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떼샷추가 Apr 15. 2022

내가 키워줄게

[밟아도 밟히지마 ep.08]

어리숙한 사회초년생에게는 많은 유혹이 있다. 아직 내공은 부족한데 의욕만 지나치게 앞선 행동은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특히 이때는 그릇된 것에 대한 거절 또한 쉽지 않아서 아닌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도 한다.          



이제 막 방송을 시작했을 무렵, 일로써 만난 방송국 관계자 중 한 분이 나를 좋게 보셨다. 과하게 친절했으며 아주 자주 연락하셨다. 순수하고 어렸던 나는 그분이 참 어려웠다. 한 번 전화가 오면 길게는 두 시간, 보통은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매번 언제 볼 수 있을까 물어보셨다. 그분은 내가 골프를 배웠으면 했다. 방송 관련해서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데 내가 그런 분들과 같이 필드도 나가고 함께 친목을 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자기 이름을 내건 사업을 하고 있었고 거물급의 인맥을 자랑하던 그는 매번 자신의 재력과 지위에 대해 어필하셨다. 이십 대 중반이었던 내게 그는 그야말로 어른이었다. 그런 그분이 나를 이유 없이 좋게 보셨는데, 나는 그 점이 불편했던 것 같다.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그분이 나는 좋지만은 않았다.   


   

어리숙했지만 경계심이 있었던 나는, 그분과의 만남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걱정되기도 했다. 이쪽 일을 하려면 인맥이 중요하다는 말을 무시해도 괜찮은 걸까? 내가 똑똑하지 못한 걸까? 쉬운 길을 두고도 어렵게 돌아가는 건 아닐까? 거절하면서도 내가 너무 벽을 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했다.    


  

 사실 그때의 나는 인맥을 쌓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방송 경력도, 실력도 아주 미미했기에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인맥 쌓기란 이렇다. 내가 상대와 비슷한 정도의 수준일 때, 그러니까 그만한 대화를 나눌만한 경험과 내공이 있을 때 동등한 위치에서 건강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이 타인에게도 내게도 떳떳한 인맥이며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는 소통의 관계이다. 그렇기에 턱없이 부족했던 내가 과분하게 넘치는 분들을 만나가며 인맥을 쌓는 것이 부담이었고 불편했다.        


        

그리고 그분의 제안이 편치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은 항상 나를 키워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가능성이 있고 분명 크게 될 사람인데 자기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인가.’     



물론 그런 제안은 굉장히 반갑고 기쁜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석연치 않거나 상대가 지나치게 베푼다는 느낌이 들 때 경계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런 나를 키워준다는 것은 의심해야 한다. 부모로부터도 성인 이후에는 독립하는 것이 정상인데 누가 누구를 키워주나. 나는 내가 키워야 한다.           


어려웠지만 용기 내 그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나는 실력을 키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해서 내 힘으로 목표한 바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훌륭한 분들을 쫓아다니기보다는 그분들의 수준에 맞는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내공을 쌓았다.           



그러던 중 나는 회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되었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그분에게 연락을 드린 적이 있었다. 사실 도움이라기보다는 나의 난처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그 좋지 않은 일로 어린 마음에 무섭기도 했고, 항상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그분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당시 나는 회사 대표와 살벌한 언쟁이 오고 갔다. 자신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는 죄로 대표는 내게 육두문자와 함께 고함을 쳤다. 몸이 벌벌 떨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다잡고 나도 내 의사를 제대로 전한 뒤 그 자리에서 나왔다. 그러고 나서 대표와 나를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그분에게 바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괜찮다는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미안한데, 그건 내 일이 아니잖니. 네가 알아서 해야 할 것 같다.”  


             

돌아온 건 차가운 거절이었다. 방송 일을 하다 보면 무서운 일을 많이 겪을 수도 있으니 언제든 자기에게 전화를 걸면 다 해결해주겠다고 했던 그분은 그곳에 없었다. 그저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의 눈치를 보며 그 갈등에 끼고 싶지 않아 하는 작은 사람만 보였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회에서 만난 첫 어른에게 위로받고 싶었던 내 모습이 허탈했고 초라했다. 괜찮냐는 걱정 대신 미안하다는 그분의 말은 힘이 없었고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분을 완벽하게 끊을 수 있었고 그 또한 더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은 진리다. 조건 없는 호의는 조심해야 한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주의하자.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그 가벼운 관계는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진정성 없는 호의는 무책임한 것이며 그 기약 없는 약속은 나의 성장을 더디게 만든다. 내가 내 힘으로 바로 설 때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강인하게 이겨낼 수 있다. 나를 키워줄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밖에 없다. 오늘도 나는 나를 키운다. 다행히 잘 크고 있다. 여전히.                     

매거진의 이전글 길이 없는 곳을 걸어갈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