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도 밟히지마 ep.09]
막막했던 취업준비생 시절, 불안하긴 했어도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있었다. 그때는 내가 실력이나 사회성 모두를 부족함 없이 겸비한 사람인 줄 알았다. 취업만 되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나의 첫 지상파 진출기였던 꼬꼬마 시절, 나는 일도 대인관계도 서툴렀다. 무엇보다 내가 맡은 일만 완벽히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만 보았다. 신입이 연차가 있는 선배에게 도움의 손길을 부탁하는 것이 애교 섞인 지혜임을 잘 알지 못했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겸손히 어울리는 것이 사회생활의 첫 자세임을 배운 적이 없었다. 본디 욕심이 많았던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이길 원했고 그것을 실력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나는 이제 들어왔지만, 너보다 잘한다.’ 옹졸한 마음에 품었던 오만한 생각이었다.
첫 녹화 날, 전날에 완벽하게 숙지했던 대본은 야속하게도 대부분이 수정되었고 날 것의 대본을 마주했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다. 사실 방송에서는 직전에 대본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가장 최신의 내용으로 업데이트되어야 하는 방송의 특성상, 대본은 방송 직전까지 수정되고 또 수정된다. 그리고 그것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것이 방송을 하는 사람의 역량이고 능력이다. 하지만 신입이었던 나는 그러한 상황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뀐 대본에 투덜거리며 외우기에 급급했다. 녹화가 시작되자 나는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내 상황에 잔뜩 긴장이 되었다. 연달아 NG를 내고 설상가상으로 목까지 잠겼다. 긴장으로 몸이 경직되다 보니 목에도 무리가 간 것이다. 그때 한 선배가 나를 향해 툭 던진 말이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요.”
아니, 당연히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엄연한 일인데 나의 소중한 일이고, 많은 사람이 보는 방송인데 어떻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계속해서 NG를 내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더 자존심이 상했다. 다신 그 사람 앞에서 실수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자존심만 세고 욕심만 많았던 나는 불과 6개월 만에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되었다. KBS 지역총국에서 생방송 리포터로 출연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더 나은 실력을 위해 항상 고민하고 매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준비하면서 하루하루 달라진 모습으로 임했다. 감사하게도 담당 국장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좋게 봐주셨고 그만큼 방송에 출연하는 횟수도 많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일만 잘하고자 했다. 주변을 보지 못했고 그저 내가 맡은 일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메인 아나운서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번에 들어온 리포터인데 예쁘고 일도 잘하지?!”
국장님의 물음에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묘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띠었다. 줄곧 차가운 그녀의 태도에 난 매번 불편했지만, 그냥 일만 했다. 말 그대로 일로 만난 사이니까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방송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의상실로 들어갔는데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 자기가 곧 뉴스에 들어가는데 먼저 옷을 갈아입으면 어떡하냐며 화를 냈다. 당황스럽고 기분이 나빴지만 방송이 먼저이기에 옷을 갈아입던 중에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불쾌했다. 뉴스가 벼슬인가, 기분이 나빴다. 그 악감정은 오래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심하게도 꽤 오래 편협했다. 직장은 일하는 곳이고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게 능사라고 여겼다. 신입으로서, 이제 처음 시작한 후배로서 먼저 숙이는 법을 몰랐다. 실력이 다가 아닌 사회에서 그리 대단한 실력도 아니면서 자존심만 세웠다. 오랫동안 그녀들을 미워했던 내가 참 많이 어렸고 부족했던 점을 반성한다.
첫 녹화로 힘이 잔뜩 들어갔던 내가, 나보다 더 먼저 일을 시작한 선배에게 어려운 점을 토로하며 '어떻게 하면 선배님처럼 잘할 수 있는 거냐'라고 물어봤다면 어땠을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라는 말에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멋쩍은 웃음과 함께 솔직하게 고백했으면 어땠을까?
같이 하는 프로그램의 메인 MC이자 선배에게 첫 출근날 먼저 웃으며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실력으로 이기려는 마음보다 함께 가려는 마음으로, 배움의 자세로 친근감 있게 다가갔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시절 나의 부족했던 사회성을, 이제라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