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우공은 산을 옮기고
한 점 겨자씨는 커다란 나무를 키우고
비에 젖은 낙엽은 흙을 기름지웠다.
백발 되어 뒤를 돌아다 본다.
지나온 자리엔 희미한 기억뿐.
그 기억들이라도 주워 모으자.
내가 죽기 전 그 기억들은 잊히지 않고 살아 있으니.
그래 이제라도
기억들을 기록해 보는거야.
박완서님도 말씀하셨지. 사람은 저마다의 기억의 덩어리라고.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 나이 서른이셨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 몸엔 동생이 자라고 있었다.
동생은 유복녀다. 니가 아버지 명줄을 자르고 나왔구나 싶어 죽으라고 웃목에 놔두었지만 동생은 울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바리데기가 효자 노릇한다고 동생은 우리 집안의 효녀다.
기억속의 아버지는 동그란 안경과 양복차림에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신 사진속의 모습이다.
몽골의 게르 같은 벼 낟가리를 배경으로 의자에 앉은 어머니 곁에 단정한 양복과 외투 차림새로 모자를 쓰고 서있는 모습은 유달리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집안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는 이제 가장이 되어 농사일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농사일을 해주던 일꾼 머슴이 어머니를 속이기 시작했다.
비료 값과 농약 값을 받아내 사지 않았다.
끼니때면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갔지만 우리 논에 가서 일은 하지 않았다.
논은 쑥대밭이 되었다.
보다 못한 동네 사람이 일러주었다.
논에 한번 나가보라고.
들일을 해보지 않은 어머니는 밤 늦게 까지 농사일에 매달렸다.
어린 우리 사 남매는 알아서 학교 가고 공부했다.
가을이면 마당에 볏가리들이 가득 생겨나고
쌀가마가 토방에 쌓일 때 쯤이면 외가의 삼촌과 이모들이 찾아 왔다.
돈을 꾸러 오셨다.
표현은 꾸는거지 달라는 거다.
어머니는 친정 식구들을 피붙이라며 없는 돈까지 빌려다 손에 쥐어 주셨다.
돌봐야 할 어린 사 남매는 말썽 없이 잘 크고 있었으니.
아니 언젠가는 꾸어준 돈을 돌려 받을거라 생각하셨던게다.
그건 어머니 생각일 뿐 그들은 갚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큰 외삼촌은 외가의 전답과 집을 모두 팔아 도박 마작에 올인하셨고
교육청 장학사 신분까지 잃은 상태에서 우리 집을 찾으셨다.
이제부턴 우리 집이 거덜 날 차례였건만 어머니는 모르셨다.
자고로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 아니던가.
우리 집은 해가 거듭 될수록 빚에 쪼들려 갔다.
당시 이자율은 50 % 였다.
마당에 볏가리는 더 이상 쌀가마가 되어 토방에 쌓이지 않고 타작과 동시에 사라져갔다.
되짚어보니 일년 내내 꽁보리밥이나마 굶지 않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후로도 삼촌과 이모들은 돈을 꾸러 순차적으로 찾아왔고
어린 우리들 중 누구도 그 빚을 인지하지도 더구나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이라고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 사후 할아버지가 새 장가들어 낳은 아들을 데리고 금목걸이 금반지 금붙이를 단 새 할머니가 오셨다.
학교 가까운데 살고 있으니 데리고 살라며 아들을 맡기러 오셨다. 새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보다 나이가 적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사후 문전 옥답과 동네서 제일 큰 집이며 선산까지 팔아 새 장가를 드셨다.
몇해 지나 젊은 새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들이미셨다.
무명천 바랑하나에 대접과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한 벌을 넣고 사립문 밖에서 하냥 서계시니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부끄럽다며 마지못해 집안으로 들이셨다.
나는 남편에게 언젠가 말했다.
내가 먼저 죽어 재혼을 하거든 젊은 여자 얻어 장례까지 치러 줄거라 생각지 말라고.
독자 할아버지는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는 한량 선비였다.
한지에 조상들 제삿날만 열두 날짜를 적어 벽에 붙여 놓으셨다.
명절이면 차례상에 놓을 밥그릇을 가마솥 옆에 서서 받아 개수를 세었다.
입도 까다로워 생선고기 없으면 밥상을 숟가락으로 탁탁 치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밥상을 물리치시다 할 수 없이 식사를 하셨다.
더 나이 들어 심한 치매가 와 어머니는 똥 싼 옷들과 이불을 냇가에 가져가 빨래를 하셨다
바쁜 어머니를 수시로 불러대며 수발을 원하시던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숨을 거두셨다.
장례를 치르며 황당한 일을 목도했다.
일년내내 푸성귀 반찬 하나에 꽁보리 밥을 먹던 집에서
100근 짜리 돼지를 통째로 잡아 삶고 떡을 크나큰 시루째 만들어 온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마당에 친 차일막 아래 상엔 고기와 떡이 쉴새없이 차려 졌지만 우린 고기 한점 맛보지못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관혼상제 허례허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선소리꾼의 요령 소리와 함께 상여를 타고 마을 길을 나가 할아버지는 떠나가셨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한 장례는 마땅히 크게 치러야 되는거라 하셨다.
나중에 커서 생각했다.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고기반찬 더 해드리지.
할아버지는 5남2녀를 두셨다.
마을에서 가장 많은 농토와 좋은 집을 소유한 부자셨다.
전주 사범 동문인 삼촌과 외삼촌이 각자의 동생을 맺어주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부가 되셨다. 이북에서 철강 회사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부친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내려 와 보니 결혼 날짜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결혼식 날 처음으로 대한 사위의 체구가 병약해 보여 외조부는 이 혼인 못한다며 어깃장을 놓으셨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하얀 얼굴에 둥근 안경을 쓴 모습은 저래 어떻게 농사를 짓겠나 싶으셨다고 한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아버지는 외할머니를 뒤안으로 불러 내시곤 내가 이래 뵈지만 따님만은 절대 고생시키지 않겠으니 염려 마시라고 설득을 하셨다. 그리곤 또 외할아버지 앞에 가선 큰 절을 올리며 염려마시라는 말씀을 조곤조곤 드리셨다. 결국 결혼식은 이뤄졌다. 아버지는 회사로 돌아가서 정리를 한후 돌아오겠다며 기차를 타고 북으로 갔다. 어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절대 나없는 동안 친정으로 도망가지 말라셨지만 가다 걱정되어 찹쌀떡을 사들고 다시 돌아와 도망가지 말라는 부탁을 거듭 한 후 가셨다. 약속대로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6.25 전쟁이 나고 공산군이 마을을 점령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군에 의해 며칠 사이 할머니는 아들 셋을 잃으셨다.
대구 사범 전주 사범을 졸업한 삼촌들은 교직에 있었을 뿐 별다른 사회 활동이 없었지만 밤중에 불려가 다음 날 죽음을 맞이 했다. 손 쓸 새가 없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한 막내 삼촌은 참전한지 몇달이 채 안 되어 유품으로 돌아왔다. 나라에선 국립묘지에 안장하고자 했다.
할머니는
“우리 선산이 있소. 가당 찮소.”
후손 없는 학생을 선산에 묻었다. 지금 그 산소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뿐더러 그 선산은 진즉에 남의 손에 넘어갔다.
마을엔 다시 국군이 들어왔고 딸은 공산군에 협조했다는 신고로 국군의 손에 떠나셨다.
모두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니편 내편 가른 지도자들의 이념은 무서운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왔고
이념과는 무관한 민초들은 목숨을 잃었다. 니편 내편 가르는 작금의 정치 현상에도 전교조의 싸움에도 거부감이 크다.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엔 남은 사람들이 견뎌내야 할 상흔만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병약한 아버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겨우 살아 남으셨으나 그도 오래 살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면사무소의 서기일을 보셨다. 공산당 점령시에도 계속 일을 하게 되었고 총살자 명단을 접하게 되었다. 퇴근하는척 동네 총살 예정자의 집에 들러 피하라는 전갈을 하셨다. 뒤이어 국군이 마을에 들어오고 아버지는 부역자로 총살자 명단에 올라갔다. 소식을 접한 동네 사람들이 탄원을 해 아버지는 총살은 면했지만 원래 병약한지라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세상에 가장 큰 배신자는 어린 자녀와 젊은 아내 그리고 양부모를 두고 일찍 죽어버린 사람이다. 누가 운명을 거스리랴.
감당키 어려운 가혹한 현실에 할머니는 그만 심장마비로 아들들을 따라 가셨다. 심장마비는 기가 막힌 병이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에겐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진다고 한다.
어머니는 동네 잔치집에 가시면 술을 먹고 하염없이 울며 마치 살풀이 춤을 추듯 훠얼훨 미친 춤을 추셨다.
초등학교 졸업즈음
6학년 담임선생님은 수차례 집에 오셔서 어머니를 설득하셨다.
중학교를 꼭 보내야한다고.
성공할 아이니 대처로 보내야 한다고. 친구들은 서울에 식모로 공장으로 가는 때였다.
선생님의 간곡한 설득으로 심심산골 가난한 집 딸은 도시로 가게 되었으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
동네 사람 집에 나를 데려갔다.
사전에 부탁도 없이 입학식날 무작정 데려다 던져 놓고 가버렸다.
도저히 있어선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한채
나는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버려졌다.
검정고시를 봐야 할 집안에서 학교라니 당치도 않았다.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오빠가 검정고시 보겠다며 시골집으로 내려가는걸 보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 채 놓친 길들은 작거나 크거나를 막론하고 수도 없이 많다.
우리의 수호 천사는 바로 이웃의 말이나 모습을 통해 알려준다. 우린 수많은 기회들을 그저 흘려 보낼 뿐이다.
심지어 본적 없는 사람들의 글을 통해서도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어느 마을에 홍수가 났다. 대피하라는 방송이 할머니 집에도 들려왔다.
할머니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할머니를 태워 가려고 트럭이 왔으나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살리러 오실거다 라며 타지 않았다. 집이 물에 잠기자 할머니는 지붕위로 올라가 기도를 했다.
이번엔 헬기가 지붕위로 날아와 타라고 했다. 할머니는 하나님이 나를 구해줄거라며 타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만 하늘나라에 가고 말았다. 하나님께 따졌다. 왜 나를 구하러 오지않았느냐고.
하나님은 대답했다,
방송으로 피하라고 했으며 트럭을 보내서 타라고 했고 세 번째는 헬기까지 보냈다고.
연고 없는 집에 몰염치한 더부살이를 했다.
그들은 천사였지만 나는 철부지였고
인생에 부끄러운 큰 빚을 졌다.
종로 도서관 서가에 갖다 버리고 싶어도 내 인생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시기로 인하여
나는 평생 마음 괴롭다.
프로이드는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아이는 일생동안 우리의 내면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 없이 홀로 고생하시는 엄마를 알기에 방 얻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다. 모르겠다.
방얻어 달라는 말이 묵살당했을 수도.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좋은 사람인줄 알았다.
착하다는 틀에 갇혀 내 의견을 쉽게 말 할 수 없는 아이가 되는 걸 몰랐다.
속수무책 수동적인 아이가 되어 힘든 현실을 타개하지 못한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주저앉혔다.
세상은 반항아들과 고집 센 아이로 인해 발전되고
삐딱선을 탄 아이도 이담에 바다에 나가면 고래를 잡을 수 있다.
다행히도 나는 학교에 가면 행복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나를 칭찬해주고 좋아했다.
숫기 없고 못난 나를 반장으로 세워주었다.
작은 오빠가 대학을 가게 되었다.
어머니와 담판을 지으셨다.
일년 수입이 얼마고 갚아야할 빚이 얼만지 셈을 했다.
농사한 수확은 빚 이자만 겨우 갚을 뿐이니 논을 팔자고 했다.
어머니는 못 판다고 했다. 빚은 니들이 돈 벌어 갚아주면 된다고.
작은 오빠는 대학은 꼭 가야겠으니 당장 돈이 필요하다 했다.
결국 능금논과 수 논이라 불리던 번듯한 논들은 팔기로 결정이 났다.
아버지 생전에 장만한 옥토들이다.
화가 많이 난 큰 오빠는 술을 먹고 들어와 불만을 표했지만
겨우 식량 할 논 뙈기만 남겨두고 애면 글면 안고 있던 논들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
오랫동안 어머니는 그 쪽만 쳐다보면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고 3이 되자 담임 선생님은 어머니를 불러 서울대학에 보내라고 졸업 후 취직 안 되면 우리학교에 교사로 써 주마고. 당시 장학금을 받으며 사립학교를 다녔다.
교감선생님까지 말씀하셨지만 오빠들과 어머니는 펄쩍 뛰며 안된다고 하셨다.
여동생이 고 3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어머니를 부르시고 친히 자취방에 오셔서 의대를 보내라고 하셨다.
꼭 합격한다고.
이때도 어머니는 그런소리 말라고 안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큰오빠는 다른 가족들은 생각지도 않고 너만 아느냐며 혼을 내었다.
누군가가 말했지. 나 뿐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만 기왕에 가난한거 몇 년 더 가난하면 풍족함이 배가 되어 몇십년을 누릴 수 있을텐데 지금의 가난은 빨리 벗어나고 싶은 어둠이었다.
오랜 가난은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가렸다.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힘을 앗아갔다.
가난은 죄가 아니고 불편 할 뿐이라지만 분명 가난은 죄다.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무뢰배다.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빠들 자식 중 의사는 며느리 사위 포함 다섯명이나 된다.
동생은 울며 단식에 들어갔으나 결국 당시 2년제인 교대에 수석 합격하였다.
매일 울며 상심에 빠져 있던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수석합격자 소식에 동생 이름이 불려지고 이름자 적힌 신문뉴스 한 줄과 함께 그도 나처럼 초등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딸들은 빨리 돈을 벌어 가족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존재였다.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셨고 오랫동안 그 표창장은 벽에 걸려 있었다.
우리 자매는 받은 월급을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의 가난을 모면시키고 싶었다.
아뿔싸 이제 어머니는 돈이 모아지면 아들들에게 주기 시작했다.
논을 다 팔아 써버렸으니 아들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사라졌고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어머니에겐 대신 딸들이 벌어다 주는 돈이 생기지 않았는가 .
아들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어 한스러운 어머니는 딸들에게 돈을 받아 아끼고 아껴 아들들에게 아낌없이 주셨다.
어머니를 위해 나는 늦은 결혼을 택했다.
돈을 좀더 벌어다 주고 싶었다.
교수 약사 좋은 자리 다 놓치고 교사인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나름 시골 부자로 인정해주는 집안이었으나 맞벌이라는 이유로 밑 빠진 독이 기다릴 줄이야.
사람의 인복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는지 나의 인복은 어렸을 적 더부살이로 다 소진되었나 보다.
작은 오빠가 어딘가에서 구해 모은 부품들을 조립해 만들어준 작은 라디오는 당시 우리들의 보물이었다.
껍데기 없는 라디오를 건전지와 함께 검정 고무줄로 친친 감아 사용했지만
그 안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들은 우리를 달래주었다.
라디오로 듣던 사이먼과 가펑글의 험한 세상에 다리 되어를 칠십 넘은 노인이 되어 동영상으로 다시 듣는다.
All your dreams are on the way
당신의 꿈은 진행중입니다.
See how they shine.
보세요.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