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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자와 어떻게 만났을까

by 일용직 큐레이터

몇 년 전 어느 겨울, 아르메니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TV에서 우연히 본 코카서스 다큐멘터리를 보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코카서스 3국 중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약 2주간 돌아보는 일정이다.


가족과 친구들은 "네가 거길 왜가?"라는 반응이다.

생전 처음 들어본 나라라 어머니는 걱정이 한가득이셨다.

생소한 나라는 젊어서 가야 더 재미난다.

그냥 이런 마음을 갖고 가볍게 출발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옛 소련국가다.

그래서 러시아어를 쓴다.

친구를 사귈 겸 언어교환 어플에 러시아어를 설정해 두었다.


출발 전 우연히 언어교환 어플에서 아르메니아 친구를 만났다.

한국어를 전공하는 여대생으로 아르메니아에 오면 가이드도 해준단다.

아주 운이 좋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아르메니아 예레반으로 가는 직항이 없어 가장 저렴한 환승구간을 택했다.

예레반행 비행기에 탑승하니 아시아인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다들 네가 여기 왜 있어? 하는 눈빛을 보낸다.


예레반에 도착해 친구를 만났다.

한국어를 어쩜 그리 잘하는지.

이 친구는 이란에서 출생한 아르메니아인이다.


아르메니어를 모국어로 쓰고 러시아어도 잘한다.

이란에서 태어나 페르시아어를 배웠고 영어도 수준급이다.

그런데 전공은 한국어다.

정말 머리가 좋은 친구다.



아르메니아 친구와 1주일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조지아로 떠났다.

예레반에서 조지아 트빌리시로 가는 마슈루카(봉고차)를 탔다.

자동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경험은 처음이다.


요상한 노래가 흐르는 마슈루카에서 할 일없이 핸드폰만 본다.

그러다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Hello


언어교환 어플에서 짧은 인사를 남긴 건 러시아 여자였다.

나이를 보니 22살.

사진을 보니 긴 생머리에 큰 키, 상상하던 러시아 미녀였다.


Hello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어디 사냐, 몇 살이냐, 직업이 뭐냐 등등


조지아를 여행 중이다 했더니 깜짝 놀란다.

우리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거길 왜가 하는 반응이다.


아르메니아, 조지아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큰 기대(?)도 관심도 없었다.

보통 그렇듯 대화거리가 떨어지면 자연스레 연락이 끊긴다.


그런데 이 러시아 여자는 다르다.

매일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11살이나 많은 한국 남자에게 관심을 두는 러시아 여자라니...

대화를 이어가다 언젠가 을 요구하겠지.

그럼 바로 연락 끊어야지.

딱 이런 마음으로 대화를 했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대화는 이어졌다.

6시간의 시차가 있지만 답장이 빠르다.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 사진을 공유했다.


친구와 동물원 간 사진, 카페 간 사진

러시아 여자는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가득 보내온다.

정말 예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무렵까지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어느 봄 날, 그녀는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영상 통화를 하지 않을래?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연애세포가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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