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19살 때쯤이었나.
아버지와 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던 중, 나눴던 대화가 기억난다.
행복한 삶이 무엇인 거 같냐던 아버지의 질문. 그리고 말 그대로 답을 몰라 침묵했던 나.
"좋아하는 일, 거창한 일을 하면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게 행복한 삶일 것 같지?
사실 제일 행복한 건 잔잔하게 이어지는 평화로운 일상이 제일 행복한 거야."
묵묵히 핸들을 돌리며 던졌던 아버지의 한마디에 난 여전히 침묵했다.
그때의 내겐 그건 행복이 아니었다. 어떻게 대단하지 않은 삶이 대단할 수 있지?
하고 싶은 게 많은, 지나치게 꿈이 많은 미성년자는 그때 그랬다.
영화로 따지면 한 10초 남짓될 그때의 순간을 수년간 잊고 살았다.
그 사이 다양한 것에 도전도 해보고, 실패도 해봤다. 또 성공도 했고, 지겨워도 해봤다.
그때의 아버지가 말했던 것처럼, 좋아하는 일, 나름의 거창한 일을 하며 마음 가는 대로 살아봤다.
그리고 이제야 끄덕여지는 고개. 수년이 지나 난 아버지의 말에 긍정했다.
사실 제일 행복한 건 잔잔하게 이어지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행복에 대한 강박은 무섭다.
특히 요즘 세상은 나를 둘러싼 모든 곳에서 행복을 강요하다시피 한다.
행복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마냥.
마치, '너는 왜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거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라며
각종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판매한다. 그리고 난 구매했다.
누구나 그렇듯 행복을 위한 갖은 수단들.
사치품도 사고 해외여행도 갔다. 적어도 그 순간은 행복했기에 그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로 말미암아 보건대 현대인이 가장 빠르고 간편하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소비가 아닐까 싶다.
소비는 확실하고 빠르거든.
하지만 소비가 멈추면 행복도 멈췄다.
그리고 그건 그것대로 비상이다.
고통을 감내하며 일을 하면, 결국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고통을 이겨내면 행복해야 하는데.
소비를 멈추면 행복할 수 없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이라니, 제대로 끔찍한 일이었다.
그렇게 절대 행복하지 않은, 행복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했다.
'내가, 굳이 행복해야 하나?'
행복하기 위하고자 했던 행동이 결국 불행으로 귀결됐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해야 하는 건가?
어쩌면 행복에 대한 강박이 결과적인 불행을 촉진하는 것은 아닌가?
행복을 내려놓기로 했다. 행복할 필요는 굳이 없다.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내게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하루고, 그 하루 속 어떤 순간이 행복하다면 그건 말 그대로 행복할 뿐이다.
감히 내가 멋대로 부여한 행복이란 가치에 짓눌리지 않는다.
행복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행복한 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