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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an 29. 2023

거리두기의 “거리”는 대체 몇 미터인지 아시는 분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그 당시 정부는 우후죽순 퍼져나가는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n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 22시 이후부턴 포장, 배달만 허용 등의 말 그대로의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실시했다. 21세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상상조차 못 했던 행동 제약들이 무려 정부 정책으로 떨어지자 모두들 불평불만이 그득그득했지만 적응의 동물인 우리 인간들은 이 정책에 비아냥과 조소를 날리면서도 착실하게 따랐다. 어차피 따를 거면 왜 비난하나 싶지만 이런 방식이 과연 방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러운 점이 꽤나 많은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실내 마스크 착용이 의무이기에 일단 마스크는 쓰고 들어가지만 식사가 나오면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고 밤 10시면 식당 문이 닫히니 모두들 집으로 모이거나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은 채 음주가무를 즐겼던걸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방역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그래도 “1년쯤 지나면 코로나 바이러스도 없어지겠지. 조금만 참자!”라는 마음으로 정부 정책을 따랐지만 결국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시국에 모두들 지쳐 “거리두기 같지도 않은 거리두기는 이제 그만하자!” 입을 모아 외쳤다. 전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글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굳이 따지자면 사회적 거리두기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병원 근로자인지라 팬데믹 사태의 심각성을 몸소 느끼는 하루하루를 보냈기에 남들 눈엔 유난이라 보일 정도로 몸을 사렸다. 당시에는 그렇게라도 제약을 두어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5인 이상 모임 금지, 어떨 때는 4인 이상…. 결혼식은 100명 이하, 어떨 때는 50명 이하…. 대체 거리를 얼마나 두는 것이 정답이었을까? 좌우지간 우리는 바이러스가 더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거리를 두긴 둬야겠는데, 몇 미터를 둬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두기가 될지. 뭐가 맞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물론 아직도 코로나가 잊을만하면 퍼지고 또 퍼지는 끝나지 않은 팬데믹 한가운데에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는 완전히 해제된 시점이다.(심지어는 실내 마스크 규제도 완화된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나를 다시 정답을 알 수 없는 거리두기의 혼란 속에 가져다 놓은 건 뜻밖에도 인간관계다. 모든 관계에는 항상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적당함의 기준이 어려워 그렇지 거리가 필요한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는 가족과도 거리가 필요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우리가 24시간 얼굴을 맞대며 함께 산다면 글쎄…. 지금만큼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같이 살 땐 눈만 마주치면 치고받고 싸우기 바빴던 혈육남 역시 떨어져 사니 가끔은 애틋한 마음이 든다.(정말 가끔이다.) 현재 나와 내 가족들은 할 말이 있다고 벌컥 방문을 열듯이 서로의 경계를 순식간에 허물며 만날 순 없지만 보고 싶다면 언제든 1-2시간 안에 달려가 만날 수 있는 그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어 참 행복하다. 약 10년에 걸쳐 더 멀리도, 더 가까이도 살아보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가장 안정적인 거리두기에 성공한 셈이다. 오케이, 가족들은 대충 80km. 그렇다면 지인들은…?




  요즘 나의 최대 고민거리  하나가 바로 “지인과의 적당한 거리두기는  미터인가.”이다. 정말이지…. 요즘 나는 혼란스럽다. 학부생  정말 좋아했던, 인 사이로 발전했다면 사랑까지 하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선 막연히 짐작만 가능한 친구가 있다.  당시엔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멋지고 하는  족족 재미있고  통하는 사람이 있지 싶어  마음을 다해 좋아했다. 다행히도(?)  친구와는 결국 연인이 아닌 친구 사이로 남아 지금까지도 종종 연락하며 만나고 있는데,  애를 만날 때마다 나는 매번 놀란다. 시간이  많이 흘러  친구도 나도 조금씩은 불가피하게 변했다지만 잊을만하면  번씩 “나는 얘를  그렇게까지 좋아했었지?”라는 생각이  만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당시엔 장점에 가려져, 그리고 콩깍지에 씌어 발견조차 못했던 단점들을 콩깍지의 보호 없이 생으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련의 만남으로 이런 포인트들이 점점 쌓이자 나는 자연스러운 멀어짐을 선택했는데,  친구는 오히려 친구로서 나와의 이런 만남이 나쁘지 않았는지 항상 다음을 기약했다. 만나고   집에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때면 항상 생각한다.  친구와 얼마나 거리를 둬야 나도  불편하고 상대방도 서운하지 않을  있을까?




 짝사랑하던 친구뿐만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계기로 친해져 급속도로 가까워진 인연이   있었다.  가까워질 당시엔 역시나  이렇게  맞는 찰떡궁합인 사람이  있지?! 싶어 요령도 없이 당기기만 해댔는데, 시간이 흘러보니 우리가 찰떡궁합까진 아니었네…? 하고 당황하곤 했다. 이런 마음의 태세 전환은  타이밍이  맞아 내가 당길  상대방은 나한테 관심이 없더니, 내가  밀어볼까 하면 반대로  밀기가 머쓱하게 상대방은 나를 당기고 있더라. 혹시라도 오해할까  덧붙이자면 나와 찰떡궁합까진 못된 지인들이 뭔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거나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그저 조심성도 없이 혼자 성큼성큼 달려가 놓고 물웅덩이를 청범 밟아 깜짝 놀라고 있는 것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멀찍이 돌부리는 없는지, 누가 씹다 뱉은 껌은 없는지 길을 조금 탐색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건데 요령도 없이 거리를 두지 않은  잘못인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요즘은 새로운 인연 만나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최근  직장 동료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나보다 한참 어리기에 전에는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몰랐는데 대화를 나눠볼수록 배울 점도 많고 인간적 매력이 넘쳐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습관처럼. 나는   친구를 속절없이 당기고 다. 아직까지는 물웅덩이를 밟지 않아 계속 달리고 있지만 혹시라도 밟게 될까 무서워 전과는 달리 주춤주춤 하기도 한다.  다섯 번쯤 먼저 연락하고 만나자 조르고 싶어도  번은 참는다. 우리가 쉽게 친해졌다가 쉽게 멀어지는 불상사를 만들까 두려워서.  고민을 들은 친구 몇은 무슨 그런 고민을 하냐며, 계산하지 말고 당기라고 조언해 주었지만  그래도  없는 친구,     먹을수록 점점  줄어들어 두려운 와중에 이별을 재촉하는 섣부른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 해서 얼마큼만 당기는  적당한진  전혀  길이 없어 나는 정말이지 혼란스럽다.












 복잡한 세상 나도 대충 생각하며 편하게 살고 싶지만 나는 머릿속에 생각을 한가득 채우도록 타고난  어쩌랴. 나는 지금 4단계 거리두기를 해보았다가 3단계로, 2단계로, 다시 4단계로 왔다 갔다 이거 저거 거리두기를 해보는 중이다. 4단계로 결정하고 나면  온몸의 세포들이 마치 강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에 반대 시위를 하던 시민들처럼 “우리는 당기고 싶으니까 거리두기 해제해 !”하고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정답을 모를  일단 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싶어 강행해 본다. 어릴 때 친구관계가 어려워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며 마음고생을  본 적이 있는데  짓을 서른이 돼서도 하게  줄이야. 마음만은 아직도 성장기 사춘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지는 밤이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 지인과의 적당한 거리두기에 성공한 현인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로 묻고 싶다. 몇 미터가 정답인지 그대는 어떻게 깨달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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