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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밤바 Sep 30. 2022

망원동에서 만난 사람들

한국 휴가 2-2

서울은 걸어서 이동해 다니기 쉽지 않은 도시지만 걸으면서 구경해야만 보이는 동네들도 많이 있다. 작은 골목골목 빠르게 지나치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세심히 봐야 발견할 수 있는 곳들, 이를테면 서촌이나 북촌, 후암동이나 해방촌, 연남동이나 망원동 등. 마침 이 날은 반려인이 합정역 근처에서 타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약 5시간 정도가 걸리는 타투였고 딱히 일정이 없었던 나는 오랜만에 망원동 나들이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약 5시간 동안 망원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 들린 곳들의 기록이다.


 번째 목적지는 퀜치커피였다. 카페에는 빈티지 느낌의 작은 나무 테이블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고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드는 카운터가 길게 배치되어 있었다. 카운터 뒤로는 빈티지 유리잔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따뜻한 빛깔의 조명이 카페 전체를 비추고 있었다. 6개의 커피 원두  산미가 많은 원두를 추천받아 주문했다. 주문을 하고 앉을 자리를 는데 뒤늦게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는   좋겠다 싶어 카페 밖의 작은 의자에 앉아 있어도 되겠냐고 물었다. 카페 사장님은 카페 내부에서 마실  아니라면 테이크아웃으로 바꿔 주겠다며 이전 결제를 취소한  1500 저렴한 4500원을 다시 결제해 주었다. 결제한 카드를 돌려주는  손이 너무 공손하여 같이  손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9월 초의 날씨는 아직 덥지만 쾌청했다. 잠깐 퀜치커피 앞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걷기 시작했다. 서점이 가고 싶었고 주변 서점을 찾아보니 두어 군데가 검색됐다. 그중 가까운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도착한 곳의 이름은 스캐터 북스였다. 한국에 살던 당시 주로 교보문고만 이용했던 터라 소규모 책방은 처음이었다. 책방 가운데에는 평대에 책이 놓여 있었고 벽면에 큰 책장이 다섯 파트로 나뉘어 있었다. 장르소설부터 그래픽 노블, 어린이용 소설까지 꽤나 다양한 소설책이 있었고, 에세이를 주로 포함한 신작들도 많이 있었다. 책을 가까이서 구경하려다가 들고 있던 종이컵에서 커피가 조금씩 새는 걸 알았다. 책에 묻을세라 깜짝 놀라 커피를 서점 밖에 내놓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나갈 때 다시 가져가겠다고 주인분께 말씀드렸다. 다시 책을 구경하다가 김혜리 기자님의 신간 <묘사하는 마음>이 있길래 집어 들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조앤 디디온의 책 <푸른 밤>도 한 권 챙겼다. 마지막으로 정희진 선생님과 김원영 변호사의 추천사가 한몫하여 트레시 맥밀런 코텀의 <시크>도 한 권 사기로 했다. 결제하려고 보니 아까 내놓은 커피 컵이 카운터에 올려져 있었다. 바닥에 내놓은 것이 마음에 쓰였는지 주인분께서 다시 커피를 가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모양이다. 커피가 새는 줄 몰랐던 주인분은 손수 작성한 본인 가게의 카페 메뉴 위에 컵을 올려놓았고 그만 잉크가 다 번져버렸다. 죄송하다는 말에 그는 다시 만들면 된다는 천천한 미소로 답했다. 가게 안에서 책을 읽고 가겠다고 했더니 종이컵 속 커피를 유리잔에 옮겨 담아 주셨다.


주인께선 책방을 시작한 지 1년이 좀 지났지만 아직 자리를 못 잡았다고 하셨다. 독립 서점이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갈수록 적어지는 책 판매부수를 고려했을 때 그 힘겨움을 예상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생 대형서점만 이용했던 나로서는 소규모 독립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는 경험이 생소했다. 뒤늦게 찾아보니 <푸른 밤>과 <시크>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재고가 없었다. 사장님의 취향 덕분에 실물을 보고 구매할 수 있었고, 온라인 주문보다는 책의 만듦새를 보고 즉흥적으로 사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고마운 경험이었다.


동네 독립서점의 유행은 도서정가제 시행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초대형 온라인 서점을 통해 책을 대폭 할인된 가격에 빠르게 구매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신간은 할인폭이 적은 편이었지만 구간 중에서는 절반 값에 구매가 가능한 책들도 많았고 할인쿠폰을 몇 개 적용하면 몇 천 원 안 되는 가격으로 주문 후 다음 날 책을 받아 볼 수 있었다. 도서정가제 시행은 독립서점의 독립 토대를 제공해주긴 했지만 여전히 이들이 온라인 서점과 대형서점의 편리함을 넘어서긴 역부족이다. 상품을 직접 제작하여 판매하는 사업과 달리 유통만 하는 서점 같은 경우 대형 유통업체와 경쟁해서 승산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뉴욕에서 우연히 방문했던 작은 서점 중에는 절판된 책이나 역사적인 책들의 초판본 등을 판매하는 독립서점이 있었다. 어떤 루트를 통해 희소성이 높은 책들을 확보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서 독립서점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운영자의 취향과 큐레이션의 힘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편집자의 추천이라든지, 고급 인력 여럿이 만들어내는 대형서점의 각종 기획과 경쟁하기엔 쉽지 않다.


문득 영화보기에 대해 생각했다. 몇 년 사이에 영화 보는 문화가 급격하게 변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로 인해서다. 대부분의 영화를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고 한 달에 두어 번 영화관에 간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어디서 본' 영화인지가 중요해졌다. 혼자 방에서 노트북으로 봤는지, 빔프로젝터로 봤는지, 영화관에서 봤는지, 무엇을 먹으면서 봤는지, 영화관을 갔다면 가기 전에 뭘 했고, 어떤 영화관에서 어떤 관객들과 함께 봤고, 그 이후엔 누구와 어디서 영화 얘기를 했는지가 영화 관람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어디서 샀고, 어디서 읽었고, 무엇(전자책 혹은 종이책)으로 읽었는지, 책 읽기가 단순히 책의 내용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읽기와 관련한 총체적 경험이라면 어떤 서점에서 샀는지도 중요할 수 있다 싶었다. 그러고보면 아마 이 책 세 권은 내게 오랫동안 그런 방식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 휴가 중 우연히 만나 알게 된 독립서점에서 산 책, 나와 취향이 겹치는 사장님이 운영하던 책방에서 우연히 접한 책들로.


책방을 나서 소금집델리로 향했다. 소금집델리는 잠봉뵈르 샌드위치로 유명한 곳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유명했고 지금은 안국역과 연남동에 체인을 낼 정도로 커졌다. 당장 먹고 싶어서는 아니고 다음 날 아침으로 구비해 두고자 잠봉뵈르 두 개를 주문했다. 냉장고에 두었다가 내일 먹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버터가 너무 차가우면 풍미가 덜하니 상온에 꺼내놓고 20분 정도 있다가 먹으라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신선하게 먹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혹시 집이 안국과 가까우면 거기서 사 먹는 것도 고려해 보라고 꼼꼼히 일러주었다.


며칠 전 크린토피아에서 운동화 세탁 가격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운동화 세탁비가 얼마예요?"라는 대답에 젊은 남자 직원은 "어떤 운동화요?"라고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내가 "그냥 일반 운동화요"라고 대답하니 "그니깐 일반 운동화 어떤 거요? 어떤 종류냐에 따라 다 달라요"라고 했고, 내가 신고 있는 운동화를 가리키자 "그건 일반 운동화가 아니고 트레킹화여서 4800원"이라고 했다. 그 퉁명스러운 말투에 기분이 나빠서 가게를 나와 “크린토피아 운동화 세탁 가격”을 검색해봤다. 일반 운동화는 3900원, 가장 비싼 것으로는 등산화가 5400원이었다.  대략적인 가격을 묻는 내게 대략 4-5천 원이라고 대답하면 될 것이었지만 나의 어떤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애초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그는 분위기를 싸하게 몰아갔다. 일에 관해서라면 태도는 많은 경우 그 사람의 자부심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자부하는 것을 판매하는 사람이었다면 달랐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오늘 만난 망원동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조금 남아 반려인의 타투를 하는 곳 근처의 방소정이라는 찻집에 들어갔다. 합정역 아래로 내려와 꽤나 구석진 언덕에 위치한 곳이었다. 동양적인 인테리어로 근사하게 꾸며놨는데 공간의 주인은 단연 중앙에 놓인 기다란 석수조다. 가지런히 놓인 돌들 사이로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다. 가게 바깥으로는 다소 투박한 나무 의자와 벤치들이 있었는데 구성보다는 공간 자체가 좋다. 주변 건물들로 둘러싸여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무엇보다 인적이 덜했다. 방소정은 떡을 포함한 한식 디저트를 판매하고 다양한 꽃차가 음료 메뉴였다. 꽃차는 맛보다는 눈으로 보기에 좋았는데 해 질 무렵의 선선한 공기와 찻잔에 떠다니는 꽃잎들이 꽤나 운치를 자아냈다.


스캐터 북스에서 사 온 책을 좀 읽고 있다 보니 반려인의 타투가 끝났다. 논현동에 저녁 예약을 해 놓았고 생각보다 늦어져 택시를 탔다. 저녁까지 망원동에서 먹었으면 좋으련만 일행이 있어 논현동으로 장소를 정했다. 퇴근 무렵의 합정역은 무척 바쁘고 정신 없었지만 해가 지는 것이 참 예뻤다.


망원동의 인기는 철 지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눈길을 끄는 소품샵과 작은 디저트 가게들, 취향들이 고스란히 담긴 카페들이 많다. 멋을 지나치게 부린 바람에 주변과 잘 어우러지지 않는 가게들도 더럿 있었고, 최신 유행한다는 스타일로 하나부터 열까지 인테리어를 아웃 소싱했을 것 같은 음식점들도 꽤나 많았다. 판형으로 찍어낸 듯 똑같은 이자카야도 있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대형 체인 음식점들도 여럿 있다. 그럼에도 나지막한 주택들과 함께 망원동은 고유한 정서를 만들어 낸다. 예전에 최고로 힙한 동네였고, 지금은 조금 열기가 사그라든,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 같은 정서를 포함한 채 이젠 그것까지도 정체성으로 흡수한 것 같은 성숙함도 느껴진다.


뉴욕에 와서 살면서, 특히 코로나 시기를 통과하면서 뚜렷하게 느꼈던 것은 뉴욕 시민들의 자기 동네에 대한 애착이었다. 관광객의 수요가 없어졌을 때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오래된 이발소가 사라졌고 평소 북적북적하던 카페도 사라졌다. 관광명소 조차도 문을 닫았고 재오픈을 할지 영원히 없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로컬 사람들은 이웃 레스토랑과 카페, 재즈클럽과 다양한 로컬 아티스트들을 지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애썼다. 그들을 위해 일부러 소비하고 후원하고 응원의 말을 건넸다. 수많은 카페 중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곳에서 커피를 마시면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그 카페에서 축적된 세월이 있고 그 세월과 관계는 상품 너머의 가치를 갖는다. 세월과 관계 속에서 커피는 커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책은 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방식으로 나는 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다녀온 작은 가게들도 모두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으면 좋겠다. 선뜻 먼저 테이크아웃으로 가격을 할인해주던 퀜치커피 사장님도, 자신의 유리잔을 내어 커피를 옮겨 담아 준 스캐터 북스의 주인분도, 소금집델리의 맛있는 잠봉뵈르와 방소정의 귀여운 물고기들도 모두 그 자리를 오래도록 지켰으면 좋겠다. 주목이 많은 동네일수록 머무는 사람보단 지나치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그들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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