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밤바 Sep 22. 2022

걷기 힘든 도시 서울

한국 휴가 2-1

오늘로 뉴욕에서   정확히 3 되는 날이다. 처음 1년은 이스트 빌리지에 살았고  이후로 지금까지 어퍼 이스트에 살고 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연구실은 집에서부터 걸어서 50분가량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날씨가 아주 좋은 날을 제외하고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데 문에서 문까지  30 정도 소요된다. 가장 빠른 이동수단은 자전거이고  20 정도 걸린다.


서울에서 통학을 했던 적이 있다. 네이버 지도로 찾아보니 이수역에서 혜화역까지는 지하철로 29분이 걸린다. 걸어서는 3시간 40분이다. 자전거로도 1시간 20분이다. 나름 걷기를 좋아한다고 할 만도 한데 한 번도 걸어 볼 생각을 못했고 걸어서 3시간 40분이 걸린다는 사실도 지금 처음 알았다. 이수역에 살던 시절 고속터미널역의 신세계 백화점에 자주 가곤 했다. 지하철 7호선으로 단 두 정거장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지금 찾아보니 지하철 소요시간이 4분, 걸어서는 48분이다. 그래도 고속터미널까지는 걸어서 다닌 적이 꽤 있다. 대체 몇 개의 차선이 교차되는지 가늠도 안 되는 그 이름도 이수교차로인 도로를 횡단보도 다섯 개쯤을 건너 겨우 반포에 도착한다. 구반포와 신반포는 그나마 걸을만했는데 지금은 초고층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서 위압스럽고 보기 흉한 동네가 되어 버렸다. 반포를 지나 고속터미널역에 도착하면 그 앞은 택시, 승용차, 버스가 서로 얽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서래마을을 지나는 길은 그나마 차량이 덜하지만 거듭된 오르막 내리막에 체력이 거덜 난다.


이처럼 서울에서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한국에 있을 15일 동안 공항 대여 공항 반납으로 차를 빌렸고 차를 타고 서울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서울은 차를 위해 계획된 도시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웬만한 곳은 왕복 8차선이다. 강남엔 10차선 도로도 부지기수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로들이 횡으로 종으로 도시를 채우고 있다. 이따금씩 걸으면 보행자 신호 기다리는 게 한 세월이다. 뉴욕에서 신호를 지키지 않고 무단횡단을 하는 게 버릇이 되어 차가 오지 않는 것 같으면 얼른 무단횡단을 하려다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자동차 때문에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친 것이 몇 번이다.


뉴욕에서 대중교통은 차선(次善)이다. 웬만해선 걷고 싶으나 너무 덥거나 혹은 너무 춥거나, 지나치게 멀던가, 혹은 체력이 없어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서둘러야 하는 경우는 대중교통보다는 우버나 택시를 이용하게 된다. 뉴욕에서 걷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대중교통을 타더라도 똑같이 오래 걸리고, 미친 사람들도 많고, 시설도 더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선 걷더라도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고, 또 보통은 걸어서 도달한 만한 곳들로 주로 이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뉴욕뿐 아니라 어디에서나 대중교통은 차선이다. 아무리 깨끗하고 빠른 대중교통이라 하더라도 대중교통은 그 자체로 불쾌함이 도사리는 암흑의 통로 같은 곳이다. 문제는 최선이 보행이냐 자동차냐 이다.


도시가 보행자 친화적이기 위해선 지하철역과 지하철역 사이, 버스역과 버스역 사이, 지하철역과 버스역 사이가 가까워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좋은 조건 같지만 실은 걷기 좋은 조건이기도 하다. 걸어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기 위해선 어디서든 마음먹은 즉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보장이 필요하다. 예기치 않게 즐거운 것이 걷기이지만 몸에 좋은 것이 다 그렇듯 실행 전에는 귀찮음이 앞서고 귀찮음을 상쇄시켜 줄 약속 없이는 선뜻 행동에 나서기 망설여진다. 서울은 지하철과 버스 노선을 아주 폭넓은 그물망으로 잘 엮어 놓았지만 충분히 촘촘하진 않다. 서울 평균 지하철 역 사이의 거리는 1km이고 뉴욕은 100m 안쪽이다. 대중교통을 사용하기 극히 꺼려지는 상황에서, 뉴욕에선 가급적이면 걷게 되지만 서울에선 가급적 자동차를 타게 된다.


결과적으로 서울에선 자가용 차를 구비하게 된다. 서울의 비싼 주차비와 이따금씩 있는 비좁은 골목들이 차 사용을 꺼리게 만들지만 그래도 차 만한 것이 없다.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도시 자체도 점점 더 차선을 넓히고 지하주차장을 만들고 자동차 친화적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오래 걸리더라도 역과 역 사이에 더 작은 역들이 있어서 대여섯 정거장 정도는 차라리 걷게 되는 도시가 보행자 친화적 도시다. 아이고 지하철이 1분마다 서네, 버스가 기어가네, 불평을 늘어놓더라도 그 덕분에 좀 더 걷고, 걷는 사람이 많아서 차도보단 인도를 넓히고, 보행자 신호를 단축하고, 그들을 붙잡기 위해 촘촘히 개성 있는 가게들이 늘어나는 것이 보행자 친화적 도시다.


물론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서울은 생활권이 무척 넓은 초대형 도시이기 때문에 가족과 친구와 직장이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동네 이웃만 만나면서 살 순 없고 동네 직장만 다닐 순 없다. 하지만 최소한 합정동에서 연희동까지는, 압구정동에서 논현동까지는 걸어 다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걷는 것이 생활화되면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곳으로 자신의 생활 반경을 축소시키는 일도, 그에 맞춰 직장이나 집을 이동하는 일도 비교적 수월해질 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바쁜 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