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치키차카 Mar 31. 2024

우리 여행 가자, 너의 집 앞 카페로.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나는 힘들 때마다 항상, 떠나고 싶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 모든 힘듦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도망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멀리. 어떠한 것도 나에게 그 일들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곳으로.

나는 떠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여행을 좋아하게 된 태초의 이유는 회피일지도 모른다.

아니, 회피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시절 혼자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몇 년 간 버킷리스트 1번을 차지했던 소원이기도 했지만

당시 나는 억지로 발을 빼내도 자꾸 밑으로 잡아당기는 뻘에 빠진 것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울감과 싸워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도망칠 수 있겠구나'


돌이켜보면 여행을 간다는 설렘보다는,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더 컸던 것 같다.


런던으로 향하는 약 14시간의 비행 동안 나에게 다른 고민과 걱정은 사치일 뿐이었으며

오직 입국 심사와 히드로 공항에서 나의 숙소까지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만이 나의 유일한

고민과 걱정이었다.


그렇게 여행은 행복했다. 책에서나,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과 건축물들을

직접 눈에 담으며 행복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가 깊어져 하루 종일 같이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며,

다리가 아파 앉은 벤치에서 문득 내가 유럽에 있다는 사실에 벅차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숙소를 늦게 찾아 밥때를 놓쳐, 근처 슈퍼마켓에서 급하게 산 레토르트 스프로

밥을 때우고 있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던 할머니에게 내가 너무 처량하지 않냐며

농담을 했다가 그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너는 지금 그것만 먹고 있는 게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공기와, 풍경과, 추억을 같이 먹고 있는 거야.'라고 했을 땐 괜히 울컥해 찔끔 눈물을 훔치며 벅찬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고, 유럽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 이탈리아 로마에서 나는 싱숭생숭함을 느꼈다.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는 곳마다 멋있었고, 트레비 분수 앞 알리오 올리오는 지금까지 먹었던 알리오 올리오 중에 최고였고,

후식으로 먹은 젤라또 맛은 아직도 기억이 날 만큼 맛있었는데.

또다시.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우울감은 다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국으로 향하는 약 14시간의 비행 동안 나에게 추억을 곱씹는 건 사치일 뿐이었으며

오직 나의 우울감과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만이 나의 유일한 고민과 걱정이었다.


물론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은 아직까지도 나에게 있어 행복한 기억이며, 지금까지 내 삶을 키워 온

자양분이지만 힘듦과 우울감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여행이었고, 유럽 정도면 꽤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다시 뻘 위에 두 발을 올려놓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더 멀리 도망가야, 괜찮을 수 있는 걸까.




고등학교 3학년일 때를 떠올렸다.

당시에도 난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그때 인생 처음으로 남들에게 나의 위태로운 마음을 고백했고, 다행히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소중한 도움들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소중한 도움들 중 하나는 나의 오랜 친구가 나에게 말했던 한 마디였다.


'너네 집 앞 카페에서 보자.'


친구는 우리 집 앞 카페로 와서 한참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고, 본인의 시시콜콜한 얘기도 하며

울고 웃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나는,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내가 생각보다 사랑받고 있구나.'


행복했다. 벅찼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봤을 때보다, 베르사유 궁전을 봤을 때보다,

빈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봤을 때보다 더.


그토록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집 앞 카페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사랑을 선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혹시, 힘든 순간을 지나는 중이라면,

억지로 발을 빼내도 집요하게 나의 발을 잡아 끄는 뻘에 빠진 기분이라면,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다면,


우리 여행 가자, 너의 집 앞 카페로.


작가의 이전글 나뒹구는 낙엽을 밀어주는 바람처럼 나를 사랑해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