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일상]_05
그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롤이야기를 한창 할 때 "패션 아니야?"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PC게임인 롤과 패션..? 전혀 그려지지 않는 연관고리에 당황했는데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말하는 패션에는 새로운 의미가 추가된 것 같았다.
우리 집에는 두 개의 아이패드와 한 개의 노트북, 두 개의 핸드폰이 있다. 1번 아이패드는 침대에 고정된 거치대에 매달려 눕는 순간부터 자기 직전까지 어쩌면 내가 잠들고 나서도 쭉- 돌아간다(ASMR을 틀어놓고 잠드는 경우가 많다). 2번 아이패드는 수업교재, 인터넷 강의플레이, TV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노트북은 글을 쓰거나 과제를 할 때 주로 사용하며 1번 핸드폰은 항상 소지하고 있는 핸드폰이고, 2번 핸드폰은 침대에 누웠을 때 1번을 쉬게 해 줄 요량으로 종종 사용하곤 한다. 각자의 자리에 놓인 전자기기는 늘 명확한 자신만의 역할이 있었는데 요즘 그 역할이 하나로 모아졌다. 바로 리그오브레전드 게임 시청이다.
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만약 세상에 10명의 사람이 존재하고 그들을 게임에 흥미가 있는 순서로 줄 세웠을 때 뒤에서 9,10번을 다툴 만큼이나 게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PC게임은 물론, 모바일 게임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뿐더러 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피시방은 좀 무서운 곳이라는 인식에 괜스레 방문이 꺼려질 정도였다. 그런 내가 리그오브레전드 게임 시청이라니. 이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주위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마 위로 물음표를 찍었다.
리그오브레전드(줄여서 롤이라고 칭함)라는 게임은 내가 대학을 다닐 무렵 약 15-16년도에 주변에 있는 남자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즐겨했던 게임으로 그때 당시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수강신청을 위해서 피시방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저 게임을 플레이하며 욕을 했던 게 생생히 기억나 첫인상은 별로에 가까웠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딱히 그 게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리그오브레전드 프로게이머 사이에서 가장 큰 대회인 LOL 월드 챔피언에서 한국 프로팀인 T1이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진 말이다. 하나 둘 유튜브 알고리즘에 T1에 대한 이야기와 경기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디어에서 하도 얘기가 많아 그저 호기심에 영상을 몇 번 보다가 게임 특유의 긴장과 짜릿함, 화려한 그래픽과 팀플레이에 빠져 몇 달간 유튜브 알고리즘이 점령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남자친구도 마땅한 취미 없는 내가 게임에 빠진 게 신기한지 대회 영상도 같이 보고, 자기 전 통화할 때마다 주절거리는 롤 얘기를 한참 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롤이야기를 한창 할 때 "패션 아니야?"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PC게임인 롤과 패션..? 전혀 그려지지 않는 연관고리에 당황했는데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말하는 패션에는 새로운 의미가 추가된 것 같았다. 실제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남들에게 특별하게 보이고 싶거나 잘 보이고 싶을 때, 흔히 모자를 걸치고 멋진 아우터를 걸치는 패션과 같이 자신의 취향을 걸치는 것을 또 다른 의미의 패션이라고 뜻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요즘은 그런 말도 쓰는구나 웃으며 넘겼지만 왠지 모르게 꽤 오래 머릿속에 맴돌았다. 보이는 아름다움이 중시 여겨지는 사회인 것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순전히 나만의 취향으로 간직하고 싶은 취미들마저 요즘은 패션처럼 걸쳐져야 한다는 사실이 적잖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와 동시에 조금 깊이 들어가는 듯싶지만 타인에게 좋아 보이는 취미와 취향은 패션처럼 내보이며 자랑하고, 그저 그렇게 보이는 취미들은 맘 구석에 묻게 되는 걸까 싶기도 했다. 더불어 나의 새로운 의미의 패션 역사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딱히 관심이 없는데 특별해 보이고 싶어서 시청했던 야구,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맘에 야자시간에 읽었던 어려운 고전, 집에서 써도 되건만 굳이 석식시간에 노트북을 가져와 뚱땅뚱땅 써 내려갔던 백일장 원고들.. 까보니 죄다 흑역사 그 자체다.
그런데 내 취향으로 골라온 중고서적들과 지금은 허리디스크 때문에 시도조차 못하지만 한창 빠져있었던 러닝, 즐겨보는 순정만화들은 예전부터 이어져온 것들이지만 그 무엇 하나 흑역사로 치부되는 것이 없다. 다시 꺼내 읽어도 즐거운 책들이며 한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느꼈던 상쾌함은 언제든 다시 한번 느끼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나는 스스로를 가꾸는 일을 절대 나쁘게 보지 않는다. 체격에 맞는 옷을 고르고, 스타일을 다듬는 것은 나 자신을 아끼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취향만큼은 굳이 다듬을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취향은 다듬어지지 않기에 솔직하고, 솔직하게 오래 기억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그 무엇인가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내 마음이 진실로 원하는 방향으로 즐기는 것 하나 정도는 남두는 것이 마음을 위해서도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