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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Mar 11. 2024

복잡한데요, 단순합니다.

[잔잔한 일상]_스물여덟, 공무원 그만두고 공무원 준비해요 2

공무원을 그만둬도 될까? 내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뇌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기분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밤, 나는 그냥 생각했다. "면직해야겠다"고.




 근 2-3년 사이에 낯선 사람과 10분 이상 대화한 경험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아이스브레이킹의 소재가 되었을 질문이 있다. "...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어렸을 적엔 혈액형, 별자리 같은 것들로 앞에 있는 낯선 사람과의 친구 될 가능성, 이 사람의 성격을 점쳐보곤 했다면 요즘은 단연 MBTI를 묻게 된다. 혈액형은 B형, 별자리는 양자리로 20년을 넘게 이기적이고, 독단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으로 오해받던(오해가 맞을까..?) 시절은 지나가고 선량한 사람, 배려심 깊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높으며 누구보다도 온순한 ISFJ로 환골탈태하게 되었으니 MBTI의 대대적인 유행은 내게 큰 호재였다. 


 ISFJ에 대해 찾다 보면 자주 보이는 단어는 섬세하다, 꼼꼼하다, 생각이 많다 등이 있는데 나는 이 단어에 '지만은 않다'를 붙여야 옳은 설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섬세하지만은 않다, 꼼꼼하지만은 않다, 생각이 많지만은 않다 등등. 사람은 떨어진 동전처럼 한쪽 면만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다면적이기에 특정한 몇 개의 단어로 특히, 세계 인구를 16가지로 분류하는 MBTI 등으로 콕 집어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MBTI를 듣더라도 너무 매몰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나 또한 생각이 많지만은 않은 ISFJ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을 그만두어야 하나 했을 때 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처음 '면직'을 머릿속에 담았을 때, 어쩌면 나는 이정하 시인의 시 [더 낮은 곳으로]의 한 구절처럼 잠겨 죽어도 좋으니 생각이 물처럼 내게 밀려오리라 하는 해탈의 마음을 동시에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생각에 잠겨 죽어도 좋으니 면직을 하고 싶을 만큼 내게는 이 일에서 도망가는 것이 너무나 간절했다. 공무원을 그만둬도 될까? 내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뇌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기분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밤, 나는 그냥 생각했다. "면직해야겠다"고. 그래서 그 뒤로는 면직을 해도 될까? 가 아니라 면직하면 뭐 하지?로 고민이 바뀌었다.


 면직하면 뭐 하지? 는 내게 더 많은 생각을 안겼다. 22살에 공부를 시작하여 23살 한 번의 낙방을 거치고 24살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직에 입성했을 때, 학교 다니는 내내 죽어도 학교에서 죽자를 신념으로 개근한 것처럼 죽어도 직장에서 죽자!라는 부푼 꿈(?)을 안고 입사를 했다. 평생을 범생이로만 살아서 나 하나 살아보자고 무언가를 포기할 성미가 못 되는 내게 "면직"은 일종의 "실패선언"과 같았다. 내가 바로 남들은 다 버티는 공무원 세계에서 허약한 정신머리 하나 어쩌지 못하고 픽하고 쓰러진 사람입니다!라고 온 세상에 떠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공무원을 그만둔다면 가장 먼저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의미 있는 직업을 가져야만 했다.


 그렇게 10년 전 17살의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생일대의 진로고민을 27살에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공무원이 워낙 박봉이니 돈 많이 주는 전문직을 해볼까? 도 싶었다. 하지만 두 번의 실패는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애정 없는 일을 돈만 바라보고 선뜻 시작하기엔 겁이 많았다. 사업은 성향상 맞지 않고, 사기업에 도전하자니 경력이 변변찮았다. 워크넷도 들어가 보고, 네이버에 인기 있는 직업 TOP10도 검색해 보았지만 다 마땅찮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정말로 좋아하는 거, 취미로 남겨두고 싶은 것, 오래 해도 질리지 않은 것들을 쭉 - 생각했고, 어느 날 밤, 나는 또 그냥 생각했다. "사서"가 되어야겠다고.


 이게 내가 ISFJ임에도 생각이 많지만은 않은 이유다. 예전에 지나가듯 읽은 글에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8번의 이직을 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는데(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 너무 얼핏 본 글이었다.) 공무원이 된 사람들은 대게 많은 일을 해보았거나, 첫 직장이어도 평생을 뿌리내릴 마음으로 시작한다. 나도 분명 그랬다. 하지만, 세상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평생을 뿌리박고 살 직장을 그만두는 고민임에도 어느 날 밤 단순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면직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내가 과연 생각이 많고, 꼼꼼하고, 섬세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어디 가서 MBTI를 말할 때 ISFJ라고 말하는 것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감을 잃었다. 아,,, 잇프제(ISFJ)이긴 한데요,,, 네,, 그게 뭐 꼭 다 맞지는 않더라구요,, 하는 구질한 사족을 붙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만은 않다'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평생을 하기 싫은 일에 발목 잡혀 매일을 그저 살아나가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누구보다 행복하게. 그래서 결정한 것이다.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생각이 많지만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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