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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Mar 25. 2024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잔잔한 일상]_스물여덟, 공무원 그만두고 공무원 준비해요 3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정수기 옆에서 가지는 커피타임에 주고받는 농담 한 마디와 전날 저녁에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들에 낄낄 웃는 실없음이 지루한 수업시간을 보내는 힘이 되어주었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누군가 내게 올 겨울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노래를 뽑으라 한다면 두 말할 것 없이 선택할 노래. 바로 신인그룹 [투어스 -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이다. 약속 없는 주말, 궂은 날씨가 아니라면 인근 대학교 대운동장을 30분 정도 걷는데 작은 먼지 같은 눈이 솔솔 내리는 겨울에 이 노래를 들으며 산책을 하다가 문득 평교원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내가 다니고 있는 평생교육원은 1년의 수업을 문제없이 들으면 문헌정보 학위+ 정사서 2급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과정으로 2023. 8월 마지막주에 개강했다. 집에서 출발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10분, 버스 타고 50분, 지하철 타고 30분 또다시 걸어서 20분을 걸으면 나오는 교육원은 학교 내 경사도 어마무시해서 꼭 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워낙에 소문난 길치인지라 첫 등교를 앞두고 익숙하지 않은 길을 20분이나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큰 압박을 느껴 네이버지도 로드뷰로 찬찬히 걸어갈 길을 탐색한 후에야 겨우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아침 10시에 시작하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 6시 50분에 일어나 대충 준비를 마치고 후다닥 도시락을 싼 후 7시 25분쯤에 나오면 7시 40분에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 아침 출근시간과 학생들 등교시간이 겹쳐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버스에서 내림과 동시에 탈진할 정도로 기가 쏙- 빠졌다.


 전 직장을 다닐 때 친하게 지내는 동료 중에 다른 학교에서 이 과정을 완수한 언니가 있었다. 평교원에 원서를 내기 전에 이것저것 조언을 얻었는데 언니는 아주 단호하게 가능하면 또래랑 친해지라고 말했다. 팀플 과제가 있을 수도 있고 점심시간에 밥이라도 같이 먹으려면 나이가 비슷해야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는 게 그 뜻이었다. 한 학기가 다 지난 지금에야 1년이 짧게 느껴지지만 입학하기 전에는 1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긴 마라톤처럼 느껴져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언니 말이 곧 법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고 고행길 끝에 도착한 교실. 도착시간이 예상보다 20분은 더 넘게 늦어진 탓에 앞자리는 이미 솔드아웃이었고, 쓱- 주위를 둘러보니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은 이미 비슷한 나이대끼리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망했다'는 생각에 그래, 오늘은 첫날이고 어떻게든 새로운 사람은 사귈 수 있을 거야 라는 마음으로 눈앞에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 내 엠비티아이는 ISFJ. 낯선 사람에게 말 거는 걸 굉장히 어려워했다. 그래서 첫 수업 교수님이 들어와 오티를 진행하고 수업이 끝나고 하염없이 점심시간이 흐르는 와중에도 옆자리에 앉은 분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식은땀만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혹시.. 몇 살이에요..?" 하는 구세주와 같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옆자리 짝꿍이 말을 걸어 준 것이다. 개미가 기어들어가도 한참은 땅굴을 팠을 것 같은 목소리로 "28살이요.." 답하자 중년쯤으로 보이는 짝꿍은 살짝 당황하신 듯싶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몇 마디 말을 이어가고, 점심을 같이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단 둘이 먹는 식사는 둘 다 자신이 없었는지 필사적으로 앞 뒤로 덩그러니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점심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했고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 넷은 매일 점심을 함께 먹는 동료가 되었다.


 그렇게 모인 [평교원 점심모임] 멤버는 총 4명으로 미혼 1과 기혼 3으로 분류할 수 있고 자녀유 2 자녀무 2로도 분류할 수 있다. 평교원은 1년의 과정이고 나는 대외적으로 공감왕, 친절맨의 타이틀과는 달리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꽤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이라 이 과정에서 맺어지는 인연에 대한 큰 기대가 없었다. 월-목 매일 돌아오는 점심시간을 함께 보내는 그저 그런 동료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교원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했고, 1학기에 24학점 매일 10시-16시 30분까지 휘몰아치는 수업과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료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들이 내 과제를 대신해준다거나 시험을 대신 봐준다거나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쏟아지는 폭풍우들은 오로지 나 혼자 감내해야 할 문제들인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을 함께 견디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가 힘든 상황인걸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고개 끄덕여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학기를 버티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정수기 옆에서 가지는 커피타임에 주고받는 농담 한 마디와 전날 저녁에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들에 낄낄 웃는 실없음이 지루한 수업시간을 보내는 힘이 되어주었다. 맥주라는 공통점이 있는 우리는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면 의례적으로 저녁을 함께 했으며 쉬는 시간 중간중간에 간식을 공유하는 먹거리친구로도 서로의 곁을 지켜주고 있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웠다. 계획대로 되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든든한 커피메이트, 맥주메이트, 과제메이트, 시험메이트, 간식메이트, 낄낄 메이트를 얻었으니 가끔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첫 만남을 달가워해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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