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일상]_06
"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드니까 너무 힘들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어요. "
-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中 -
2024년 설날, 퇴행성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은 20대 환자가 되었다. 21살 대학교 기숙사에서 침대 뒤에 빠진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무언가를 꺼내겠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침대를 들어 올리려다 삐끗한 허리가 20대를 내리 괴롭게 하더니 드디어 질병이 된 것이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허리는 종종 말썽을 부리곤 했다. 그때는 허리가 아프다기보다는 러닝을 하고 나면 무릎과 발목이 부서질 듯 아프다던가 하는 등의 방사통의 형태로 통증이 나타났다. 무릎이 아파서 정형외과를 가면 허리가 문제라고 하니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을 따르려 사무실 의자에 커블을 두는 등 딴에는 노력했지만 탈이 났다.
사실 노력이라고 말하긴 좀 민망한 수준이다. 키가 작은 탓에 사무실 의자에 앉으면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언제나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고 이를 조금이라도 예방하기 위해 차선책으로 아빠다리를 택한다는 게 “제 허리 가져가십쇼-”하고 허리건강을 내어주는 꼴이 되었다. 이에 더해서 집에서도 항상 좌식 생활을 해왔으니 허리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말하기 참으로 부끄러운 것이다. 이런 불찰 덕에 설날 연휴 전전날부터 시작된 허리통증은 사람을 앉지도, 눕지도, 걷지도 못하게 만들었고 기어이 엄마로 하여금 창창한 20대 딸내미 수발을 들게 만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한 달 전부터 이상하게 오른쪽 엄지가 저렸는데 이는 곧 오른쪽 얼굴과 다리로도 번져 정말 몸에 이상이 생긴 건가? 하는 불안을 증폭시켰다. 명절을 앞두고 원래의 계획보다 본가를 일찍 방문했었는데, 증상의 원인을 찾고자 뇌 CT를 찍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길게 내려간 본가에서 드러누워만 있는 딸이 안쓰러웠는지 설 연휴 마지막날에 문 여는 병원을 찾아가 바로 허리와 목 MRI를 찍게 했다. 결론은 퇴행성 허리디스크. 3-4번, 5-6번 척추 사이의 디스크가 까맣게 변해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지금 당장 허리 수술이나 시술을 하는 것은 아까운 단계지만 이렇게 10년을 살면 무조건 수술을 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날로 우리 모녀는 입원을 선택했고, 그렇게 연초부터 입원생활을 시작하였다.
25년에 공무원 시험을 볼 요량으로 1월부터는 공무원 인강을 들으며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 걸린 브레이크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손가락이 저릴 때부터 불안하긴 했으나 난데없는 허리디스크 판정이라니. 24년의 시작부터 뇌 CT에 목, 허리 MRI를 찍고 종국에는 허리디스크 진단이라... 그 와중에도 손가락 저림 증상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힘든 일은 한 번에 몰려온다던데 딱 그 꼴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병원 생활도 그닥 유쾌하진 않았다. 병원 시설과 의료진은 좋았으나 같은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버거웠다. 처음 인강을 구매했을 때의 계획으로는 한창 수업의 절반을 넘겨야 하는 시점에서 병원에 드러누워있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답답했다.
매일 수액을 맞아야 하는데 혈관이 약한 탓에 양팔은 멍투성이가 되었고 앉아있지도 못했던 탓에 책을 읽지도 못했으며 당연히 공부는 저 멀리 날아갔다. 그렇게 10일을 병원에서 보낸 후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우울했다. 부모님, 남자친구 앞에서는 "뭐 그럴 수 있지"하며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탈감과 상실감이 느껴졌다. 완벽하게 낫지 않은 허리로 개강을 준비할 때는 밤마다 "이 허리로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성한 허리로도 힘든 통학길은 허리디스크 환자에게는 곤욕 그 자체였다. 임시방편으로 준비한 허리 쿠션도 수업시간 내내 6-7시간 앉아있는 자세를 버텨주지는 못했다.
우울로 좀먹어가고 있을 때 도서관에서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읽게 되었다. 민음사 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즐겨보는데 영상에서 추천받은 책 중 하나를 읽어보려던 차에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은 명함을 가지는 일은 하지 않았으나(흔히 말하는 사무직), 격동기의 대한민국을 지탱해 준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통하여 여성노동의 삶을 되짚어보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된 여성들의 굴곡진 이야기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 많았고, 세세한 통계수치들을 보며 내가 '여성의 노동'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깨달았다. 그중, 내가 참 좋아했던 대목이 있다.
"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드니까 너무 힘들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어요."
-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中 -
책 중 인터뷰이인 할머니는 아픈 시어머니와 남편을 돌보며 아이들을 홀로 키워내다시피 했다. 꽤나 흥했던 의류사업은 망했고, 시장에서 국수장사를 했는데 그때의 심정은 지금의 내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팍팍했을 것이다. 헌데, 할머니는 무릎 꿇지 않았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서 너무 힘들었지만 결코 도망가지 않았다. 그 덕에 현재는 나이 듦이 무색하게 본인의 일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힘듦에 있어 점수를 매기고 누가 더 힘든지 말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잘 안다. 허나, 현재의 내가 그 상황 속의 할머니만큼 버거울까? 힘이 든 걸까?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인생이 어떻더라 말하기엔 한없이 어린 나이지만, 세상이 항상 친절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세상의 심술궂음에 넋나가 주저앉아있으면 그대로 카운터펀치에 쓰러지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가수 에픽하이의 노래 Don't hate me 중에 [이런 비호감, 공공의 적인 나와... 숨만 쉬면 논란, 공공의 껌인 나와 도마 위에서 춤을 추며 즐기는 너. 취향 하나 참 죽이는 너.]라는 가사가 있다.
어떤 도마 위에서라도 춤추며 즐기는 취향 죽이는 내가 되고 싶다. 어떤 파도에도 쓰러지지 않고 그 위에서 탭댄스 추는 그런 미치광이가 되어 삶의 파도를 타고 싶다. 내일도 병원에 간다. 허나 우울하지 않다. '내일은 무슨 노래에 맞춰 춤을 춰야하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