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를 준비하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엑셀을 처음 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가지고 뭘 하란거지? 하는 생각과 함께 금방 창을 닫게 마련이다.
하지만 엑셀은 첫인상이 주는 막막함만큼 그 어떤 오피스 프로그램보다 활용 가능성과 범위가 넓고 깊다.
그런 엑셀의 25년 차 사용자인 나는 25년째 사용하는 기능이 스무 가지를 채 넘지 않은 초보 수준이다.
임원이 되는 여러 가지 장점과 더불어 가장 큰 단점은 자신 고유의 역량-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은 줄어들고 소속된 조직 내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역량, 마음, 태도가 바뀐다는 것이고, 그 결과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줄이고 결국 자신의 커리어 무덤을 파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組我一體라고 부르고 싶다)
임원으로서 누리는 많은 혜택들이 결국 이러한 나를 잃고 특정 조직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희생 아닌 희생의 대가가 아닌가 싶고, 임원의 혜택이 크다면 그만큼 그 희생이 크다는 반증이라 여겨진다.
상위 부서에 보고할 자료를 부하직원이 일차 작성하여 보냈으나, 내가 요구한 중요한 팩터가 빠져있었다.
수정 지시를 할 수도 있지만, 그냥 내가 직접 수정해야겠다 생각하고 엑셀 앞에 앉았다.
내가 원하는 최종 보고서의 틀이 눈앞에 그려졌고, 엑셀의 특정 기능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기능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기능은 '피벗테이블'... raw data에서 내가 원하는 항목들을 열과 행으로 불러내 표를 만드는 기능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순간 말로만 듣던 임원의 역량 퇴행이 떠올랐고, 씁쓸했다.
어렵게 피벗테이블을 떠올려서 보고서를 수정하여 보내고 나서, 엑셀 함수와 기능을 다시 공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하지만, 피벗테이블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즉, 피벗테이블은 내게 과거의 기능을 잊지 말고 여전히 대리, 과장처럼 일하라는 게 아니었다.
그건 시간과 조직의 니즈에 역행하는 것이다.
내가 대리, 과장처럼 일하면 그들이 좋아할까? (우리 상무님 최고! 이럴까?)
이건 오히려 밥값 못하는 거다.
즉, 이젠 피벗테이블을 사용하는 일을 잘할게 아니고 일차적으로는 조직 내에서 내 자리와 기대에 맞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이차적으로는 그 조직의 요구가 다한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