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utumn dew Apr 07. 2024

봄이 데려온 휴전

호수 위에 비친 자화상

혼자 지내다 보면 모든 집안(이라기엔 조그만 기숙사 방 하나지만)일을 홀로 해내야 하는데 그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다름 아닌 빨래다. 한 사람 분의 빨랫감은 양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굳이 물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 꼭 빨아야 하는 것들은 손빨래를 하고 급하지 않으면 평일에 한 번 정도 빨랫감을 모아 빨래를 한다. 현재 머물고 있는 기숙사에는 세탁실 세탁기가 층마다 여러 대 다. 빨랫감을 먼저 넣는 사람이 임자.


학생들기숙사에 얹혀사는 몸이라 나는 직원이라는 사실을 티 내지 않으려 재빨리 몸을 옮긴다. "샤샤샥" 최대한 빨리 중앙휴게실 지나 세탁실로 향하는데, 최근 들어 헛걸음이 잦았다. 세탁실 세탁기 모두 풀가동 중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겨울방학 중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3월이 되고 학생들의 개강과 함께 세탁실은 눈치싸움이 오가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됐다. "샤샤샥" 재빠르게 갔다가, "슈슈슉" 실망과 함께 돌아오는 다소 느릿해진 발걸음.


그러다 얼마 전, 세탁실의 비수기를 알아냈다. 다름 아닌 금요일 저녁. 보통 집이 가깝거나 이곳에 연고가 없는 학생들은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한창 놀고 싶은 나이니 불금을 보내러 갔을 수도. 덕분에 금요일 저녁의 세탁실엔 꼭 한 대 정도의 세탁기가 입을 벌린 채 남아있다. 싸매고 간 빨랫감을 기분 좋게 비운 뒤 '요때쯤 찾으러 오면 되겠다!'하고, 빨래 다 되는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방으로 돌아온다.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어느덧 한낮의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 그동안 겨울과 봄이 얼마나 밀당을 했는지.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의 초입, 살랑이는 꽃잎과 함께 노랑에 가까운 초록이 나무에 피어난다. 오래전 글쓰기 모임을 했을 때, 사람들은 계절을 주제로 글을 쓰는 일을 좋아했는데 그들이 가장 설레는 표정으로 글을 내보였던 주제 역시 '봄'이었다. 그들 중엔 이렇게 나무가 빚어내는 여린 기운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지금에만 볼 수 있는 노랑에 가까운 초록, 어쩜 매년 보아도 볼 때마다 그렇게 여리고 예쁜지.




산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참으로 고맙게도 이번 주 출장지 근처에 큰 호수가 있었다. 매일 저녁을 먹고 산책을 갔다. 봄기운이 완연한 호숫가에는 나무들이 새로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자체로도 충분했거늘 호수 울처럼 비친 풍경으로 인해 소생의 기운두 배가 된 느낌. 책하는 시간은 체로 일몰 때라 운이 좋은 날엔 해가 지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볼 수 있었다. 렇게 붉은 낙조를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마음 일렁, 오리들이 호수를 노닐 때마다 물가에 비쳤던 노랑에 가까운 초록도 함께 일렁다.



출장을 끝마치고 돌아오니 다시 금요일. 기숙사로 돌아와 세탁실로 가서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었다. 전쟁에 굳이 참전하지 않고, 틈을 노린 전략이 잘 맞아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곧 있으면 이런 눈치싸움에 끼어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마침내 찾아온 봄과 함께 나의 옷들이 곧 물갈이를  예정이.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는 조물조물 손빨래를 해서 물이 잘 빠지는 곳에 살짝 걸어두기만 해도 다음 날이면 뽀송하게 마. 그러니 이제 지금 같은 전쟁 참전할 필요가 없질 것 같다. 봄이 데려온 휴전.



이윽고, 마침내, .

호수의 표면을 경계 데칼코마니처럼 뿜어냈던 봄의 기운과, 그 가운데 둘러싸여 있던 나는 떻게 비쳤을까. 나는 볼 수 없었던 나의 모습. 나도 봄의 일부가 되어 그들과 잘 어우러졌을까.




지난 주말, 동생에게 부탁해 집에 있던 봄 블라우스들을 택배로 받아 기숙사 옷장에 걸어두었다. 아직은 여전히 겨울인 것 같다고 몸을 꽁꽁 싸맸던 나도, 다음 주 출근엔 옷장 속의 블라우스들을 꺼내 입어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세탁실의 휴전과 더불어, 어쩌면 그렇게 봄의 일부를 흉내 내 볼 순 있겠다. 여린 분홍과 노랑에 가까운 초록의 이파리들마냥, 나도 곧 나풀나풀 일렁일 순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꾸며낸 모습으로나마 봄의 일부가 되고 싶다. 다른 건 몰라도, 나도 겨우내 작고 큰 전쟁들을 치러내고 지금껏 잘 살아남았.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거야.


뮤지컬 <빨래>의 '슬플 땐 빨래를 해'라는 넘버를 좋아한다. 내가 빨래를 좋아하는 이유를 나보다 더 잘 설명해 주는 것 같. 노랫말대로, 이젠 더  깨끗해지고 더 잘 마 기분 좋은 나더 자주 걸치게 될 것 같다. 오랜 출장에 업무는 쌓여버렸고, 그 무게를 덜기 위해 나는 가벼운 옷차림과 함께 머리를 올려 묶 4월의 첫 출근을 준비한다.


그렇게 봄을 입고, 봄의 일부가 되어, 봄과 어색함 없이 잘 어우러질 수 있길 바다. 하루하루씩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작가의 이전글 이방인의 욕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