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긴 글을 쓰는 일이 부담스러워 그림일기와 유사하게 사진 한 장과 세줄 정도의 글을 덧붙이는 '세줄일기'라는 앱을 쓴 적이 있다. 그때에 나는 틈틈이 찍어둔 여행사진과 함께 여행하며 느꼈던 내 생각들을 세줄로 덧붙여 저장해두곤 했다. 그중 한 페이지 떠오르는 것이, 스톡홀름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이었는데아침 일찍 여행을 나서면서 버스를 타고 가며 버스 안 풍경을 찍어둔 사진이었다. 그 사진과 덧붙여 내가 작성해 두었던 글은, '그대들의 출근길이 나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을 여행의 일부인데, 나의 출근길도 누군가에게는 그럴싸한 여행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와 같은 느낌의 문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간직한 수많은 소중한 풍경 속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 그들은 내가 이리도 그들이 등장한 장면을 아련하게 떠올린다는 것을 모르겠지. 하지만 그대들 덕분에 순간의 모양이, 허전하지 않고 형태가 있음을. 우연으로 인해 박제되어 버린 순간이지만, 그럴싸한 등장인물들이 있어 더 근사하게 추억할 수 있음에 감사 인사를 건넨다.
주말의 짧은 여행 이후 연이어 근 2주간을 출장을 다니다 보니, 이보다 더 오랜 시간 사무실을 비워본 적이 있었나 싶다. 역시 감사실 생활은 가까운 미래도 예측할 수 없다. 해외여행도 겨우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서 다녀오곤 했었는데, 여기선 휴식하는 날에도 오롯이 쉬기는커녕 짐을 풀자마자 다시 꾸려야 하는 날이 되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런 여정을 바랐던 건 아닌데.
여태의 나는 이곳저곳을 틈틈이 돌아다니며, 발자국을 남기는 일을 좋아했다. 한편으론, 여행지가 늘어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이 모든 것을 오래 담을 수 없는 기억의 한계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사진으로, 글로 순간을 오래 기억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여행 아닌 여행으로 전국을 쏘다니다 이번 주, 출장의 일부였던 워크숍에서 서해 바다를 다녀왔다. 실로 장관이었던 풍경에 감탄하다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는데, 반려견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한 가족이 내 프레임에 담겼다. 고요한 풍경이었으나 그들로 인해 사진 속 볕의 온도는 더욱 따듯하게 느껴졌다.
곳곳에 남겨지는 나의 발자국들 중 한 순간이라도, 나도 누군가에게 그럴싸한 배경화면의 일부로 남을 만한 것이 있었을까. 그렇게 된다 한들 내 사진 속의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나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테지. 알지 못해도 좋으니, 아주 작고 미약한 순간이어도 누군가의 평화로운 순간에 나도 작은 역할의 등장인물이 되어 소소한 일부로 자리하였으면 좋겠다. 아주 사소한 우연으로, 그러나 제법 근사한 등장인물로.
상대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이 나에게 오래 기억되었듯이,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럴싸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스레 생활하며 누군가의 프레임에 들어갈 수 있을까. 괜찮은 피사체가 되진 못해도, 부자연스러움에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불청객은 되고 싶지 않은데. 오래 간직할 나의 지나온 순간들 속 이름 모를 등장인물들이 그러하였듯, 언제 어느 순간 누구에게 오래 기억될 사람이 될지 모르니 자연스러운 발걸음과, 배경에 어울리는 튀지 않는 보호색으로 다시금 내일의 장면에 뛰어들려 한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행인의 본분에 충실하며.
걸음을 쓸쓸히 여기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가야 할 길을 가고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린 날의 바람대로 나의 일상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여행의 일부로 비칠지 모른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핵심은 '자연스러움'. 그래야 피사체인 나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깨에 힘을 빼고 터벅거리지 말고 가벼운 걸음으로 앞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