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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Feb 25. 2024

찬물에 발 담그는 찰나

온탕에서 냉탕으로 온 이에게

적게 받는 대신 그만큼 적당히 일하려고 사기업이 아닌 나랏밥 먹는 일을 택했거늘, 나는 왜 이렇게 일복이 많은 건가. 가끔 세상이 날 시험한다고 생각한다. 바빠 죽겠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또 주어지면, 일거리의 신(?)께서는 마치 나에게 '요놈 봐라. 이것도 해내는지 보자'하고 새로운 일거리 하나를 툭 던져주고, 겨우겨우 해치우면 또다시 '오호. 그걸 또 했단 말이지? 그럼 이것도 해봐라. 옛다!'하고 또 새로운 일거리를 던져주곤 했다.


그래서 가끔 일이 없을 때는 오히려 불안했다. 항상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일거리의 신께서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오호라. 저렇게 놀고 있단 말이지. 아주 큰 녀석을 보내주마.' 하며, 혹 벼루고 있을까 봐 일이 적 때에는 마치 일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입사 초반, 당시 기관장이었던 분께서 하셨던 이야기 중 오래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다. 윗사람이 보기에, 새로 온 직원이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처음 판단할 때, 그가 맡게 된 일이 마치 하던 사람이 한 것마냥 잡음 없이 난하게 진행되를 본다고. 당연하고 단순한 말인 것 같았지만, 신입 시절 쐐기로 박혀버린 그 말은 나에게 종종 부담이 되곤 했다. 나라는 사람이 이 조직에, 이 부서에 새로이 들어옴으로 인해서 아무런 파동이 없길 바라게 됐다. 항상 고요해야만 하는 호수처럼, 내가 새로이 왔다는 이유로 물결이 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리 고요한 호수랄지라도 툭 던져진 돌멩이 하나에 잔잔한 물결이 멀리까지 일렁이거늘.


그래서 항상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잔잔한 물결이 일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 또한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겉으로는 순수한 눈빛으로 새로운 환경이 신기한 듯, 마치 잘 적응하고 있는 듯 웃으며 출근했지만 사실 남몰래 등뒤로는 물결이 일렁이지 않도록 나만 아는 둑을 쌓아둬야만 했다.



인사이동 후 첫 주 근무를 마치고, 이전에 함께 근무했던 존경하올 부서장님께 안부인사 차 연락을 드렸다. 나의 안부인사를 재빨리 스킵해 버 그는, 오히려 나의 안부를 물었다. 익숙하고 다정한 그에게 어리광을 피웠다. 바보가 된 것만 같다고.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듣던 그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따뜻한 온탕에 있다가 냉탕에 들어갈 때, 발을 딱 담그는 순간 엄청 차갑잖아.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 봐. 그 물이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지 않잖아. 지금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문제는 내가 아니라,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거야."


길을 걸으며 그와 통화를 하다 그 말에 순간 발걸음을 멈칫했다. 여태껏 내 등뒤에 남몰래 쌓아온 둑들도, 그저 찬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찰나의 두려움일 뿐일 거라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의 말에 잠시 길을 잃고 할 말도 잃었다. 어쩜 그런 따뜻한 비유가 있을 수 있을까. 그의 말 한마디는 냉탕에 내던져 있다 생각했던 내가, 반대로 잠시 담근 온탕에서 느낀 찰나의 따뜻함 같았다. '녹았다'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듯.




첫 장기출장을 앞두던 시점, 새로운 근무지에서 만난 어느 선배가 험난하기 그지없는 출장 일정들이 가득한 나에게 무심툭 던지듯 말했다. "그냥 즐겨.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즐겨. 그래야 버텨." 흔히 었던 '노력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첫 장기출장을 앞두고 나는 그녀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시선과 태도를 바꿔 즐겨보자고.


출장지는 지방의 어느 소도시였는데, 예산의 한계로 출장지 근처 모텔에서 장기숙박을 하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모텔 안에 있는 휴지곽에 새겨진 다소 낯부끄러운 다방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장 기간 동안 저녁마다 선배들과 현지 맛집들을 전전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렇게 틈틈이 자주 웃었다. 리고 이곳에 이렇게 기록해 두었으니, 언젠가 곱씹을 재미난 추억으로 곰삭기를 기대한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KTX 안에서 무한 재생되는 뉴영상을 무심코 바라보다, 생활정보를 알려주는 코너에서 뜬금없이 '찬물 샤워의 효능(?)'을 소개해 주었다. 근육에 무리가 는 운동 후에 찬물샤워를 하면 근육을 풀어주는데 도움이 되고, 수축이 되기 때문에 피부에도 좋다나.


어쩌면 그처럼 지금 이 도기가 주는 차가운 찰나, 피부로 느끼는 차가움 뒤 보이지 않는 다른 효능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대신 영상의 말미에 너무 차가운 물로 오래 샤워를 해선 안된다고 했는데, 그처럼 나에게도 차가운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기만을 바랄 .


그리고 나의 존경하올 부서장님께서 말씀하셨듯, 지금의 이 차가움은 내가 해결할  아니라, 시간이 해결할 일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즐기는 것, 아니 즐기려 노력하는 것. 그뿐이리라.


온탕에 있다 냉탕에 온 모든 이들이, 온도에 대해 스스로의 잣대를 내세우기보다는 그저 시간을 인내할 여유를 먼저 가졌으면 좋겠다. '앗, 차거!'에서, 뜨뜻미지근한 온도로 느껴질 그때를 향해. 잣대를 내세우는 당신이 너무 뜨겁기에, 이 온도가 더 차갑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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