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말라카의 유령

붉은 노을 아래 숨은 칼날

by 최경열

사랑과 추억을 뒤로하고 우리 배는 싱가포르를 출항했다. 이제 말라카 해협을 통과해 벵골만을 가로질러 인도에 닿을 예정이다. 적도를 지나 북위 $2^{\circ}$를 향해 항해한 지 두 시간. 창밖으로는 수천 척의 선박들이 중앙선 없는 해상 고속도로 위에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적도제를 지내지 않아서일까, 선내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해상 실크로드, 그 화려함 뒤에 숨은 그림자

말라카 해협은 전 세계 선박 물동량의 30%, 대한민국 원유의 90%가 지나는 그야말로 '세계 바닷길의 목줄'이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 호주 쪽으로 우회하려면 무려 7일이 더 걸린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 항로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좁은 수로, 빠른 해류, 낮은 수심... 해저에는 침몰한 배들이 수없이 가라앉아 있어 '화물선과 보물선의 공동묘지'라고도 불린다.

Gemini_Generated_Image_9t5szb9t5szb9t5s.png 말라카 해협

이 지정학적 요충지를 서구 강대국들이 가만둘 리 없었다. 14세기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이곳을 점령한 이유는 명확했다. 말라카는 실크, 향료, 도자기가 집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였기 때문이다. 수리 조선소가 즐비했던 아시아 최대의 항구 말라카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인도, 일본을 거치며 독특한 다문화 도시로 변모했다. 그러나 영국의 점령 이후 싱가포르에 그 위상을 내주었고, 이제는 인구 60만의 쓸쓸한 관광 도시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았다.

하지만 화려했던 도시의 쇠락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둠의 그림자를 불러왔다. 말라카의 작은 마을들이 '해적 소굴'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Gemini_Generated_Image_h4sz12h4sz12h4sz.png 말라카항구

세인트폴 언덕의 음모: 두 명의 약탈자

말라카 해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세인트폴 언덕. 한때 대형 교회가 서 있고 사람들로 북적였던 이곳은 이제 흉물스러운 귀족의 무덤과 폐허가 된 교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 언덕 낡은 벤치에 포르투갈 혼혈인 A 씨와 그의 일행이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역회사 사장이던 아버지가 실업자가 되며 가세가 기울자, 베테랑 잠수부였던 A 씨는 생계형 어부가 되었다. 오염된 바다에서 줄어든 어획량에 허덕이던 그들은 침몰선에서 보물이라도 건져 포르투갈로 귀향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때, 남루한 노숙자 차림에 검은 안대를 쓴 중년 사내 K 씨가 다가왔다. "보물 찾는 것보다, 해적질이 돈은 훨씬 빠릅니다. 나도 끼워 주쇼."

그는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에서 부상을 입고 밀항해 온 베테랑 해적 두목이었다. 아덴만 여명 작전으로 와해된 소말리아 해적의 잔당이었던 그는 특수 훈련을 받은 전문가였다. 가난에 지친 A 씨 일행에게 K 씨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fc92zcfc92zcfc92.png 세인트폴 언덕

괴물이 된 어선: 45노트의 공포

K 씨의 지휘 아래, 그들의 5톤급 어선은 무시무시한 병기로 개조되었다.

엔진: 저속 디젤 대신 350마력 고속 야마하 엔진 2대 장착.

성능: 일반 상선의 3배인 45노트(시속 약 80km).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속도다.

장비: 레이더 방지 특수 코팅, 최신 GPS, 수심 측정용 에코사운드, 풍향풍속계.

위장: 겉으로는 그물과 어로 장비를 갖춘 평범한 어선. 하지만 어창 깊숙한 곳엔 고기 대신 흉기, 던짐 줄(히빙라인), 암벽 등반 장비가 가득 찼다.

완벽한 위장을 위해 VTS(해상교통관제 시스템)에 신고까지 마친 그들은 시험 운전에서 완벽한 기동력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냥뿐이었다.

Gemini_Generated_Image_4yivdl4yivdl4yiv.png 해적선 설명 <제미나이 설명>

타깃 확정: 태극기가 펄럭이는 '장보고호'

해적들은 다시 세인트폴 언덕에 올라 망원경을 조준했다. 목표는 명확했다. 화물을 많이 실어 배가 묵직하게 가라앉아, 수면에서 갑판까지의 높이(건현)가 낮아 쉽게 올라탈 수 있는 배.

그때, 선미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들어오는 배 한 척이 보였다. 컨테이너 8,000개를 실어 흘수선이 푹 내려앉은 '장보고호'였다. "타깃 확정이다. 가자!"

어둠이 내리는 바다, 붉은 노을을 가르며 해적선이 장보고호를 향해 전속력으로 출항했다.

그 시각, 장보고호의 3등 기관사인 나는 링링에게 보낼 편지를 소중히 갈무리하고 있었다. 곧 다가올 폭풍 같은 운명은 꿈에도 모른 채, 당직 시간에 맞춰 육중한 엔진 소리가 들리는 엔진 컨트롤 룸(ECR)으로 향했다.

출항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