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링링'
일주일 넘게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뚫고 남으로, 다시 남으로 항해했다. 지독하게 지루했고, 사무치게 고향이 그리웠다. 바다는 결코 내가 꿈꾸던 낭만만 있는 곳이 아님을 뼈저리게 실감하던 나날이었다.
갑판에 올라서니 숨이 턱 막히는 열기가 엄습했다. 우리 배는 열대 바다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었다. 그토록 거칠던 파도가 거짓말처럼 잦아들며 바다는 거대한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지구본 위의 빨간 선, 위도 $0^{\circ}$인 '적도'에 다다른 것이다.
바다 위에 실제 빨간 선은 없었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의 정적은 기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돛에 의지하던 옛 선원들이 왜 이곳에서 '적도제'를 지내며 징크스를 두려워했는지 이해가 갔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그 적도를 지나자, 드디어 수평선 너머로 희미한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의 심정이 이랬을까. 빌딩의 불빛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곳,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무역의 거점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 항에는 수천 척의 선박들이 거대한 에베레스트산을 띄워 옮기듯 엄청난 화물을 싣고 도열해 있었다. 하역과 선적을 위해 일주일간 정박하게 된 우리 배에서, 나는 동료 3등 항해사와 함께 설레는 첫 상륙에 나섰다.
달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조심스럽게 육지를 밟았다. 한국과는 다른 열대 식물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모든 것이 생경했다. 당시 싱가포르는 지금과 같은 치안 1등국이 아닌, 개발의 열기와 혼돈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우리는 오차드 로드에서 쇼핑을 즐기고, 센토사 섬의 백사장을 걸으며 마도로스의 피로를 풀었다.
사건은 부두로 돌아오던 어두운 길목에서 터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쇼핑백 속 고량주 병이 깨지며 진한 술 향기가 진동했다. 흑인 건달 서넛이 우리를 덮친 것이다. 땅에 쓰러져 올려다본 어둠 속에는 그들의 하얀 이빨만 번뜩였다. 코피를 흘리며 벌벌 떠는 동료를 보며, '물가를 조심하라'던 할머니의 점괘가 스쳤다.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던 그때, 멀리서 경찰들이 달려왔다.
강도들에게 모든 것을 털리고 정신을 잃을 뻔한 우리를 구해준 신고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젊은 여자였고, 더 자세히 보니 눈부시게 예뻤다. 사건이 커지는 것이 두려워 선장님께는 비밀로 했지만, 감사의 마음은 전하고 싶었다.
다음 날,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우리 배가 내려다보이는 그랜드 호텔 라운지에서 그녀와 마주 앉았다. 이름은 왕링링(王玲玲). 23세의 중국계 대학생이었다. 초롱초롱하고 예쁜 눈매를 가진 그녀는 한국어에 관심이 많아 서툴게나마 한국말을 건넸다.
"999는 경찰, 995는 구급차예요. 9(Jiu)와 구할 구(救, Jiu)는 발음이 같거든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어제의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해 주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매력적이었다. 대륙의 중국과는 달리 친절하고 세련된 매너를 가진 싱가포르 여인. 언어의 장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눈빛으로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바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자랐다. 해녀였던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삶을 보며 바다가 단순히 낭만적인 공간이 아님을 알았지만, 어느덧 자란 작은 꿈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이었다. 그런 내게 링링은 거친 파도 속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닻과 같았다.
일주일의 정박이 끝나고, 배는 다시 인도양을 향해 기적을 울렸다. 당직을 마치고 침실에 누우면 링링의 영롱한 눈빛이 천장에 아른거렸다. 중학교 시절 풋풋했던 짝사랑 이후 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감정이었다.
'이것이 사랑일까?'
생명의 은인이자, 한국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 고민하며 나는 편지를 썼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바라보며, 다음 항구에서 그녀의 답장을 마주할 설렘을 문장에 실어 보낸다. 링링을 만난 후, 이제 나에게 바다는 지루한 고립의 장소가 아니라 그녀에게 닿기 위한 설레는 항로가 되었다.
[마도로스 첫사랑] 다음 연재분 예고: "인도양의 뜨거운 태양 아래, 링링에게 보낼 선물을 고민하며 나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과연 그녀에게는 어떤 선물이 어울릴까?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이 넓은 바다를 건너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다음 이야기에서는 인도양에서의 항해와 링링을 위한 특별한 선물, 그리고 편지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흥미진진하게 다음 편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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