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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Nov 22. 2023

보트피플 BOATPEOPLE (연재 15)

베트남 항로를 지나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란다. 잠시 나는 애벌레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다가 다시 누에 애벌레가 되었다. 선원의 일상 업무로 복귀했다. 틀에 박힌 자연인이다. 20mm 철판으로 둘러싸인 누에고치이다. 창살 없는 감옥이다. 20mm 철판들이 모여 부력을 만들어 수천억이 되는 화물과 선원이 그 속에서 다시 나비로 태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꿈틀꿈틀  매일매일 반복되는 생활이다.  20mm의 힘은 대단하다. 0.2mm A4종이 한 장도  종이배를 만들어 강에 띄운다면 용도가 바뀐 배로 탄생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쇳덩어리가 어떻게 배에 뜨냐고 물어보면 나는 종종 종이배로 설명한다. 


방콕항에 사랑과 추억을 남기고 출항했다. 아직도 미련이 많이 남았다. 

링링한테 싱가포르에 잘 도착했다고 전보가 왔다. 우리 배도 많은 사랑을 남기고 방콕항을 출항하였다. 도선사가 하선하고 선장은 'Run up' order를 지시했다. 협수로와 항구를 벗어나 대양에 진입했다는 신호이다. 3교대 당직업무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침실로 돌아와  다음 당직을 위해서 드러누웠다. 옆방 2 항사 방에서 아직도 여자의 신음소리 "O My God!!!"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화물선은 선실 방음 기준이 60db(데시벨)으로 옆방에서 웃는 소리는 잘 들린다.  여자들이 북적이던 poop deck에 가봤다. 임시로 지어진 포장마차는 철거되어 없어지고 덩그러니 로프줄 감는 mooring winch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밀항자라도 숨어있는지 복잡한 선박 구석구설을 살펴봤다. 아무도 없었다. 선원들은 밀항자가 아니더라도 출항하면 습관처럼 patrol 한다. 황천항해를 대비하여 소화, 안전장비들이 잘 작동하는지?. 넘어질 물건과 화물이 잘 고박이 되어있는지 현장확인한다.  

장보고함은 타이만을 돌아 남중국해  베트남 앞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필리핀과 사이를 둔 이해역은 여름에는 태풍, 겨울에는 계절풍, 봄과 가을은 대륙풍이 불어 바람 잦을 날이 없다. 바다는 너울(swell)이 심하게 일고 있었다. 날씨가 안 좋으면 선장님은 의례 한마디 하신다. "누가 항구에서 여자한테 못되게 굴었어?" 농담이지만 선원들이 믿는 징크스가 있다. 여자가 앙심을 품어 눈물을 흘리면 배가 많이 흔들린다고 한다. 흔들리다 원위치로 돌아오는 것은 선박의 복원성 때문이다. 무게 중심이 오뚝이처럼 바닥에 있는 원리다.  갑판 위에 많은 컨테이너와 화물은 선박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가 불안전한 복원성이 된다. 이때 항해사들은 평형수(ballast water)로 조절하여 안전하게 선박을 유지한다.


1983년 9월 장보고함은 베트남 호찌민시 80마일 해상에서 변침을 하여 한국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채만 한 너울로 마치 선박은 접영 수영하는 것처럼 뱃머리가 파도에 푹~잠겼다 올라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선박에서 앞뒤로 요동치는 것을 핏칭(pitching)이라 한다. 피칭이 심하면 선박도 허리에 집중 하중이 걸려 두 동강이 날 수 있어 아주 위험하다. 

경험이 많은 장보고 선장님은 파도가 많은 날은 브리지에서 직접 조타를 지시하신다. 그런데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는 조그만 어선이 들어왔다. 레이다에도 잡히지 않는 선박이었다. 표류하고 있었다. 방향 없이 움직이기 때문 우리 선박과 충돌 우려가 된다. 험한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보였다 안보였다 반복을 한다. 이 선박을 피해 변침할 려는 순간 어디선가 수십 명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장은 방향을 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스톱엔진을 명령한다. 속도가  줄면서 표류하는 배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기울어있는 선박에는 수십 명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옷은 남루하여 노숙자보다 더 처참한 풍경이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 환자와 임산부, 남녀노소 뒤죽박죽 섞여있어 전쟁터의 난민 수용소를 연상하게 했다. 며칠을 굶었는지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남았다. 마치 유령선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를 보더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애원이 아니라 목소리도 안 들리는 절규였다. 파도 속에서 더 이상 버틸지 의문이다. 몇 시간 후 수십 명이 물속에 잠긴다. 이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 친다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1975년 4월 29일 베트남 사이공이 공산 월맹군에게 점령되면서 호찌민시로 바뀌었고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미군의 피해는 막대하고  최초의 참패로 기록되었다. 6.25를 경험한 한국군도 미군을 도아 많은 공을 세웠지만 결국 공산화되었다. 패전한 미군들은 다낭 해상을 통하여 군함으로, 사이공에서는 헬기로 대거 탈출을 성공했다. 탈출 못한 남베트남 지도자나 가족들은 각종 정치적 박해를 당했다. 탄압을 견디지 못한 남베트남 국민들은 조국을 버리고 자유를 찾아 조그만 배를 타고 바다로 바다로 탈출하였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등 주변국가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파도가 일렁이는 수백km 바닷길은 눅눅하지 않았다. 탈출할 때 소지했던 돈과 식량은 베트콩 해적에게 털리고 수장되었다. 식수와 식량이 고갈되고 선박이 파손되어 바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선박도 부지기수였다. 살아서 바다에서 떠도는 베트남 사람들을 일명 보트피플(boatpeople)이라 불렀다. 1970년부터 1988년까지 탈출한 보트피플은 어림잡아 수백만 명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사망자 숫자도 조사기관마다 다 다르다. 



 1983년. 세계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양분화 되어 철저한 냉전시대에 돌입하였다.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발생된 난민은 원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입국절차를 받기 위해서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해운회사는 골치 아픈 해상의 보트피플에 관여하지 말고 화물 운송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미 선장들은 묵시적으로 해상에서 난민을 만나면 피해서 항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국가 정부 기관인 안기부에서 지시한 사항일지 모른다. 

장보고 선장님도 모를 리 없다. 만약 지시를 어기고 난민과 함께 입항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방송국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다음에는 안기부에서 공산주의와 관계있는지 조사를 받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북한 지령이 아닌지 항해사는 물론 선장이라도 각종 고문에 시달려야 한다. 수백억이 되는 화물선과 선원들은 조사를 받기 위해 출항도 못하고 항구에서 대기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없더라도 블랙리스에 올라가 선장과 항해사는 해고될 수 있고 제 취업도 안된다. 해운회사 피해금액도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그러나 누구 하나 책임 질 사람이 없다. 고스란히 선장과 선원들의 몫이다. 이러한 이유로 선장은 본인과 회사와 나라를 위해서 큰 결정을 해야 한다. 모든 권한과 책임은 선장한테 있다. 배에서는 나라의 대통령이다. 선장은 이미 결정을 하였다. 모든 이념과 사상을 떠나 인간의 생명을 최우선이라 판단하였다.

 선박을 정지시키고 전 선원들을 소집하여 보트피플을 지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우선 유령 선박이 움직일 수 있도록 윤활유, 배터리, 디젤유를 보급해 주었다. 충분한 식량과 식수를 공급해 줬다. 옷과 이불도 지원해 줬다. 다행히 오일을 보충하여 시동을 걸어보니 요란한 엔진소리와 검은 배기가스가 품어 올라왔다. 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망망대해에서 짧은 만남이지만 우리는 수십 명의 생명을 살렸다. 지금까지 인간으로 살면서 느꼈던 최고의 보람이었다. 어느 나라던 자유를 찾아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보드피플은 수평선 너머로 멀리 사라지고 없어졌다. 

 


우리는 베트남 다낭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동남아 관광지중 빠지지 않는 곳이다. 다낭은 베트남의 하와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해변이다. 맑고 투명한 해변뒤에는 어두운 비극이 숨어 있다. 다낭항은 베트남 전쟁 중에 미군의 휴양지였고 전쟁이 끝나면서 수많은 보트피플이 이 항구를 통해서 바다로 탈출하였다. 대부분은 풍랑으로 침몰하여 숨졌다. 항구에는 추모를 위한 유명한 절이 있다. 성공한 난민들이 성금을 모아 설립한 영흥사라는 사찰이 있다. 사찰 앞에는 67m 해수관음사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영혼을 달래주고 있었다. 다낭 여행 코스가 되었다.


장보고함이 부산입항하자 건정한 사복경찰이 선장을 유인해 갔다. 안기부에 끌려가 국가 보안법을 어겼는지  심한 고문을 받아 얼굴에 피멍이 들었다. 회사도 퇴직처리 되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제 취업도 포기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들었다. 선장님의 결정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울화통은 식지 않고 있다.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했다. 때는 1983년이다. 남북통일은 언제 될지? 군사독재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 

네이버 이미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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