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롱불과 요강
국민학교 등굣길은 멀기만 하였다. 무슨 공사인지 모르지만 신장로를 따라 100m마다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였다. 길이는 수십 km가 되었다. 호기심에 구덩이를 구다 보았다. 사람 키보다 깊었다. 구덩이에는 뱀도 있었고 개구리도 있었다. 부안에서 전깃줄을 잇는 철롱대를 세워야 하는 구덩이라 했다. 변산에 머지 안아 전기가 들어온다. 마침내 구덩이 공사가 끝나고 전봇대를 세우고 전깃줄을 팽팽하게 늘리는 공사를 마쳤다. 1972년 변산국민학교 가을 운동회가 있는 날이었다. 마을의 큰 잔치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운동회 하이라이트인 단축 마라톤이 막 끝났다. 마을청년들이 또 한 번 요란한 말다툼으로 운동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1등을 한 자전차 뽀 털보 아저씨가 반칙을 하였다고 한다. 마라톤 코스가 아닌 방앗간 뒷길로 자전거를 타고 500M를 달려가 자전거는 논두렁에 팽개 치고 마라톤 코스로 모르게 진입을 하였는데 계속 선두로 달렸던 세고 아저씨한테 발각이 되어버렸다. 대항리 세고아저씨는 2등으로 운동장에 들어왔지만 1등 상품으로 양은 솥단지를 받았다. 세고(석유) 아저씨는 석유를 마셔서 유명한 아저씨였다. 시골 국민학교 어린애들 얼굴에 때꾸적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가난골에 사는 인구는 비록 공부는 못했어도 다름 박질을 잘하여 상품으로 연필 한 타스와 작기장(노트)을 받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코를 실룩거렸다. 운동회는 큰 행사이지만 오늘은 역사에 남길만한 더 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해는 채석강 쪽으로 기울면서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순간에 요란한 폭죽과 함께 운동장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불이였다. 변산국민학교 운동장에서는 국회의원 이병옥 국회의원(무임소장관)이 참석하여 축하 기념사를 낭독하였다. 산내면(당시는 변산면) 주민들은 태극기를 흔들어 축하하였다. 환호성이 변산반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호롱불에서 전기불로 바뀌고 산간벽지가 환하게 밝혀졌다. 완전 다른 세계였다.
할머니께서는 도깨비 불은 봤어도 이런 희한한 불은 70 평생 처음 보신다고 하셨다.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귀신같은 불이였다. 할머니가 잠들어야 할 저녁에 스위치를 몰라 입으로 불어도 불어도 불이 꺼지지 않자 물을 한 바가지 퍼부으셨다. 열받은 전구다마가 폭발하여 초가삼간 다 태울 뻔하였다.
70년대의 대항리 우리 집은 전기는 들어왔지만 아직도 초가집이었다.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자는 구호와 함께 새마을 사업이 한참이였다.
전봇대에서 초가집 지붕에 전선 인입선이 늘어 저 있다. 처마밑에는 두꺼비 집이 있었다. 스위치와 차단기가 있는 커버를 두꺼비 집이라고 불렀다. 그 속에서 작은 접시 같은 계량기가 돌고 있고 숫자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겁이 덜컹 나셨다. 세간 살림에 벌써부터 전기세 걱정을 하셨다. 계량기 돌아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해 60와트 전구를 모두 5와트로 바꾸었다.
그래도 호롱불보다 밝았다. 호롱불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밤을 밝혔다. 저녁이 되면 등잔불 주위로 옹기종기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었다. 등잔불 밑에서 아버지는 신문을 보시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셨다. 우리는 밀린 숙제도 하였다. 한밤중에는 내복을 벗어 실밥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이나 서카리를 호롱불에 그슬렸다. 토독토독 소리까지 나지만 잘못 끄실리면 나일론 내복이 불에 타 못 입게 되었다. 이제 방가운데 자리 잡고 식구들과 애환이 깃든 등잔대와 호롱불과 이별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버리기는 너무 아까운 정든 물건이다. 집에 골 둥 품이 되었다. 언젠가 또 한 번 읽을지도 모르는 책꽂이의 소중한 책처럼 호롱불도 언젠가 필요할지 몰라 잘 닦아서 창고에 보관하였다.
호롱불과 함께 방에서 사라진 것이 요강(소변통)이다. 또망(화장실)은 마당을 지나 음침한 구석에 있었다. 한밤중 대나무 숲에서 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사그락 소리는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라 하였다. 더듬더듬 찾아가서 한밤중에 일을 보려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발을 잘못 디뎌 똥통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한밤중에는 요강이 더 친숙하게 되었다. 식구가 많은 집은 요강이 넘쳐 어머니는 중간에 한번 비어 주어야 한다. 이제 전기가 들어오면서 스위치만 올리면 마당과 또망이 훤하게 불이 들어와 불편한 요강의 인기가 수그러지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 오면서 한밤중 마실 갈 일도 무섭지 않았다. 어릴 적에 들은 귀신이야기 중 처녀귀신과 몽달귀신은 또망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깜깜한 밤중에 할머니 손을 잡고 또망까지 가서 똥을 누면서 할머니를 계속 부르고 확인하면서 똥을 눈 기억이 있었다. 똥이 안 나와 힘주다가 뇌출혈이나 빈혈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 발을 헛디뎌 똥통에 머리를 박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푸세식 또망에서 누설되는 암모니아 가스에 질식이 되었는지?, 영양실조에 변비가 있었는지? 또망귀신에 홀렸는지?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귀신도 많았다. 마을 서낭당 길모퉁이에는 처녀귀신이, 상여를 보관하는 창고에서는 몽달귀신이, 알꼴텡이 공동묘지에서는 도깨비불을 직접 봤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증언이 있었다. 헛것을 본 것인지 정말 귀신을 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기가 들어오면서 동네에 얼씬거리는 귀신은 모두 사라졌다.
대항리에 월남전에 참가하신 아재(삼촌)가 계셨다. 월남에서 미군 탱크를 몰고 다니셨다고 한다. 일치감치 전쟁터에서 왕복동 내연기관 원리를 습득하셨다. 몸에서 항상 석유냄새가 풍기어 우리는 세고(석유) 아재로 불렀다. 면허증은 없었지만 도락구(TRUCK 트럭 일본 발음)를 운전하셨고 마을에 보리탈곡하는 발동기를 시동하셨다. 발동기가 고장 나면 분해하고 수리도 잘하셨다. 겨울철 발동기 시동이 안 걸리면 세고통에서 고무호스를 쪽 ~ 빤다. 몇 모금 입에 들어가도 그냥 마셔 버린다. 입속에 충치와 뱃속에 기생충이 죽는다고 했다.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세고아재는 충치도 없고 회충도 없었다. 가솔린인지, 디젤인지, 휘발유인지 맛을 보고 구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세고 아저씨뿐이었다. 일치감치 서울도 갔다 오신 현대인이고 문명인이었다. 교류전기도 잘 아셔서 계량기를 통하지 안 하고 도둑전기를 사용하는 것도 알았다. 나중에 발각이 되어 수십 배의 벌금을 물었다.
배터리를 이용하여 냇가에서 물고기도 잘 잡았다. 아재를 따라가 배터리 충전한다고 자전거에 붙어있는 소형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서 빈 자전거를 3시간 동안 쎗바닥이 나올 정도로 힘 있게 돌렸다. 대가로 손바닥만 한 붕어 다섯 마리를 얻었다. 배터리로 재미를 보던 세고아재는 욕심을 부렸다.
세고아재는 전봇대에서 냇가까지 고압전기를 이용하면 큰 물고기도 잡을 수 있겠다는 획책을 하였다. 날씨좋은날 드디어 실행으로 옮겼다. 나는 시키는 데로 전선을 잡아 땡기는 일을 맡았다. 전선은 군용 통신케이블 삐삐선(PP Cable)을 이용하였다. 해안가 전투경찰이 사용하고 버린 전선이었다. 대나무 끝에 삼각대를 만들어 깊은 물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팔뚝만 한 가물치가 꼼작도 하지 않고 떠 올라왔다. 세고아재가 뜰채로 물고기를 뜨는 순간 악~ 소리를 내면서 물속에서 개구리처럼 쭉 뻗어 버렸다. 물고기와 함께 감전이 되었다. 나는 위험을 감지하고 대나무 삼각대를 순식간에 들어 올렸다. 세고아재는 아무 일도 없고, 거짓말처럼 다시 일어났다. 220 볼트 고압전기는 정말 위험하였다. 순식간에 세고아재가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이일로 세고아재는 석유도 마시지 않았고 전기로 고기를 잡는 무모한 일은 하지 않았다. 세고 아재의 무례한 행동은 입소문을 타고 변산반도에 널리 퍼졌다. 무지한 시골에서 누전과 감전사고가 잇따르고 있었다. 세고아재는 몸소 체험학습을 통한 얻은 지식으로 전기 안전교육을 널리 알려주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변산면에 최초로 흑백 티브이가 들어왔다. 지서리 광진이네 집이었다. 광진이는 영화관 사장이 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조그만 박스 속에서 정말로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쇼를 한다고 말로만 들었다. 그런 신비의 TV를 보기 위해 친구들이 광진이 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평상시 광진이와 친하지 않던 인구와 형규는 제외되었다. TV 한번 보려면 광진이 한테 아부하고 구걸해서 선택을 받아 합격을 해야 겨우 대문을 통과하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필름이 자주 끊기는 부안읍내 동양극장보다 선명하고 재미가 있었다.
이제 돈을 모아 극장에 갈 필요가 없었다. 머지안아 부안에 있는 동양극장과 제일극장이 문을 닫을 지도 몰랐다. 여름철 마당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모기를 쫓아가며 전설의 고향을 보고 있으면 등골이 오싹하여 어떤 납량특집 영화보다 더 감동을 주었다. 구구단도 못 외우고 학교 공부는 꼴찌인 봉숙이는 전 방송국 시간대 프로그램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 여로, 꽃피는 팔도강산, 김일의 박치기, 배삼룡과 웃으면 복이 와요, 타잔, 수사반장, 전원일기, 쇼쇼쇼, 주말의 명화~~~
대한민국 70년대는 필리핀과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낮고 못 살았다. 한국축구는 버마(미얀마)나 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어쩌다 태국을 이겨 호주나 이란과 결승 경기라도 하면 TV가 있는 집은 그때만큼은 안방이던 마당이던 다 개방해 주었다. 경기를 보면서 변산반도가 떠나갈 듯 응원하였다. 그 열기는 월드컵 운동장보다 더 뜨거웠다.
살기 힘든 가난한 농촌에 흑백 티브이한대는 온 동네에 감동을 주어 눈물과 웃음 그리고 행복을 한 보따리 선사해 줬다. 변산면 2호 TV는 지동리 봉숙이 집이었다. 봉숙이는 TV 바보상자 속에 빠져들어 유명 텔런트 장미희가 된 것처럼 착각을 하였다.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저녁 TV를 보러 남의 집 머시러 가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보고 왔다. 마지못해 지동리 이장인 양영배 씨가 딸인 봉숙이를 위해서 TV 한대 거금을 주고 구입을 하였다. 결국 봉숙이는 구구단을 못 외우고 변산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3호는 대항리 우리 외갓집이었다. 외삼촌이 제무시(GMC 자동차) 운전하시면서 현금을 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네마다 생선가시 같은 안테나가 지붕 위에 하나 둘 설치되었다. 바람불거나 비 오는 날이면 틀어진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서 티브이 화면을 바로 잡았다. 화면은 열 수 있는 자바라 문이 있었고 열쇠로 잠글 수 있었다. 70년대만 해도 변산에서 흑백 TV는 제산목록 1호였다.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