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교환수
전화기는 영어로 텔레폰이다. 전화기가 없던 조선시대 말 청나라에 유학 갔던 유학생이 전화기 2대를 들고 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였다. 적당히 부를 이름이 없어 영어 발음과 비슷하게 소리 내어 텔러풍- 덜러풍-덕률풍(德律風)이라고 불렀다. 임금님만 사용했던 덕률풍(텔레폰)은 신하들이 전화를 받을 때 절을 4번 하고 받았다고 한다. 전화기 1대가 집 한 채 값이었고 전화 한 통에 쌀 한 가마니였으니 감히 전화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주 통신 수단은 편지였다. 아버님 전상서 혹은 사랑하는 그대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는 답장이 오기까지는 1주일 이상이 걸렸다. 그래도 연애편지라도 받으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글을 읽지 못하시는 어르신들에게는 편지도 읽어 주고 대필도 해 주었다. 특히 연애편지는 글을 배웠던 사람에게도 쉽지 않았다. 서점에서 편지교본을 구입하여 아름다운 구절을 외우고 베껴 옮겨 적었다. 전화기가 들어오면서 편지는 점점 사라지고 우편함에는 반갑지 않은 청구서나 교통위반 범칙금 통지서가 도착해 있다.
변산반도에도 70년도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화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화기도 비싸고 통화비도 비싸 일반가정에서 보편화되지는 못하고 관공서에서 주로 이용을 하였다. 마을 회관에 1대가 있어 특별한 일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였다. 변산우체국에는 최 양, 박 양, 윤 양 3명의 전화교환원이 3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에게 이름 뒤에 "양"을 붙여 부르는 것이 존중을 의미하였다. 여성에게는 교환원이라는 직업은 인기가 있어 높은 경쟁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권한도 막강하였다. 교환원은 우체국 교환실에서 비행기 조종사처럼 해드폰을 쓰고 근무를 하였다. 책상 앞에는 벌집보다 총총한 구멍이 뚫려있는 콘센트 군집 판이 놓여 있었다. 수백 개의 콘센트 구멍에는 각 번호가 적혀있다. 모든 통화는 콘센트 구멍을 통해야 통화가 이루어졌다. 일반인이 전화기를 낚시 릴 돌리듯 부지런히 돌리면 아리다운 교환수 아가시 목소리가 나온다. 상대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콘센트에 번호대로 꼽아서 연결을 확인한다. 쌍방이 연결이 되면 통화시간과 통화 품질을 알아야 되므로 교환수는 어쩔 수 없이 쌍방의 통화를 들어야만 했다. 변산면에서 돌아가는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다. 나쁜 맘먹고 고급 정보를 이용할 수 있지만 교환수는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 교환원은 대화내용을 들으면서 싸움을 하거나 욕설을 한다면 차단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사랑하는 연인사이 은밀한 대화도 들을 수 있었다. 장거리나 섬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연결해 줘도 상태가 좋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면 교환원이 듣고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시골 엄니"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들 들리냐? 이번 설날에 시골에 올 거냐? " 서울에 있는 아들과 연결해 주던 교환원은 아들한테 "어머님이 설날에 올 거냐 물어보십니다" 아들대답 "이번에는 못 간다고 전해 주십시오" 교환원은 중간에서 뉘 집 아들이 명절에 오는지 무엇을 하는지 면사무소 호적계장보다 집안일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교환원 중 최 양이 위도로 발령이 났다. 70년 당시 위도는 수천 척의 어선이 불야성을 이룰 때였다. 국가 지정 큰 어항이 되었다. 서해안에 잡은 조기는 위도를 통하여 전라남도 영광으로 운반하여 그 유명한 영광굴비로 탄생하여 전국으로 판매가 되었다. 정확한 것은 위도굴비라고 해야 맞다. 위도는 전남영광보다 부안이 가까워 1963년 부안으로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변경이 되었다. 선원들의 휴식처, 식당, 선박수리업소, 어선에 필요한 그물과 어구들을 판매하는 상가들이 줄을 이어 대박이 나고 있었다. 불법 유흥업소도 많아 인신매매로 잡혀온 아가시들도 많았다. 섬이라서 탈출도 못하고 치안도 허술하였다. 위도 교환원의 인기도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위도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는 총각선생님이 있었다. 가끔 고창에 계시는 어머님과 통화 연결을 해주면서 최 양과는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전화기가 부족하여 육지와 통화 한번 하려면 줄을 이어 기다려야 했다. 당첨이 되어 호출을 해야 겨우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총각선생님은 최 양과 사이가 좋아 전화 사용은 특혜를 받았다. 전화요금 때문에 길게 통화를 못하지만 교환원의 권한으로 가감할 수 있었다. 전화기로 인하여 처녀 총각사이 섬마을에서 사랑이 싹트고 있었다. 총각선생님과 교환원 아가시사이에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결혼까지 이어졌다.
교환수는 전화기가 보급되면서 새롭고 빠르게 탄생된 직업이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또 새로운 기술인 장거리 자동전화(DDD)가 개발되면서 빠르게 없어진 직업이었다.
내가 외항선원으로 근무할 때 한 달에 한번 부산항에 입항을 하였다. 고향인 대항리 집에 가고 싶지만 거리도 멀고 정박시간이 길지가 않아 그냥 부산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보고 싶은 엄니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100원짜리 동전을 한주먹 바꾸어 DDD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줄을 서 기다렸다. 차례가 되면 박스 안으로 들어가 전화다이얼을 돌린다. 대항마을회관에 전화기 한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누구나 전화가 오면 마을회관에 설치된 마이크로 바로 방송을 해 주었다. 전봇대 위에 높이 달려있는 마을 확성기에서 "반떡 아들 깽녀리가 부산에서 전화 왔씅게 후딱 달려와 받으쇼" 엄니는 밭에 일하시다 반가운 아들목소리를 듣고 싶어 헐레벌떡 100m 단거리 선수처럼 달렸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돌부리에 고무신발 앞코가 쭉 ~찢어져 벗겨진 검정 고무신을 양손에 들고 전화기 앞에 도착하여 흙 묻은 손을 툴툴 털고 전화기를 받으면 이미 뚜~뚜~뚜 끊어져 버렸다. 엄니를 위해서 대항리에서 1호 가정집 전화기를 구입했다. 반떡은 이제 전화받으러 뛰어갈 일은 없다. 어려서부터 우리 엄니를 동네사람은 "반떡"이라 불렀다. "부안댁"을 그렇게 불렀다. 내가 깽녀리가 된 것은 반떡이 저녁이 되면 "경열아 밥 묵어라" 동네가 떠나갈 듯 나를 부르는 엄니 목소리였다. 여러 번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하니 악센트를 집어넣어 "깽녀라 밥묵으라" 엄니 목소리를 따라 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다.
세월이 흘러 이제 스마트폰 시대에서 살고 있다. 이제 반떡은 깽녀리를 부를 필요도 없이 다이얼 번호를 눌러 전화를 하셨다. 신발 벗어 뛸일도 없다. 몸이 불편하셔서 농사일도 그만두셨다. 귀도 잘 안 들리면서 아들, 딸 손자, 손녀 목소리 라도 듣고 싶어 수시로 전화를 하셨다. 전화번호를 못 찾아 엉뚱한 곳에 전화를 할 때도 있었다. 깽녀라 밥묵어라하는 동네가 떠나갈듯한 반떡 목소리는 작고 희미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깽녀리 맘이 좋을 일이 없다. 전화 좀 그만하시라고 투덜거렸다. 깽녀리는 반떡 맘을 조금도 이해를 못 했다. 이해는 했지만 인정을 하지 않았다. 반떡은 우리에게 강하고 엄한 엄니였다. 한동안 전화가 없었다. 궁금해서 전화를 해봤다. 놀랍게도 반떡이 깽녀리 전화번호를 잊어 묵었다. 자식들 생일과 전화번호를 줄줄이 다 외우고 계셨던 엄니였다.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깽녀리는 반떡이 치매가 온 걸 늦게 알아차렸다. 불효자식이다. 용돈도 넉넉히 드리지 못하고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하늘에 계신 엄니한테 알뜰폰 전화기 한대 보내고 싶다. 하루 종일 전화하면서 그렇게 보고싶어하던 손자, 손녀와 화상전화도 하고 사진이나 동영상도 보내 드리고 싶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반떡은 어디 가셨어요?. 엄니가 많이 보고 싶다. 엄니의 희미한 전화 목소리라도 하루 종일 듣고 싶다.
<사진캡처 : 네이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