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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Apr 17. 2024

14화 바다와 목수 아버지

최경열/변산출신. 선박제조 감리 감독

    내 고향은 변산면 대항리다. 바다와 닿아 있어 어린 날의 추억도 바다와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친구들과 뛰놀기 좋은 곳도 대항리 바다 갯벌이었고, 친구 부모 중에는 바다 일을 하는 어부도 있었다.

  한자로 대항(大港)이라면 먼 옛날부터 큰 항구였다 거나 큰 학이 펼쳐진 형국이라는 대학(大鶴)이라는 말도 있으나 둘 다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부안에서 격포에 갈 때, 중요한 길목에 들어서는 ‘큰 목’의 마을이라는 의미의 대항(大項)이라는 설명에 동의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항리 바닷가는 해수욕장처럼 수심이 낮아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항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태어난 집

행정구역상 새만금 방조제 전시관이 있는 서두터를 시작으로 묵정리, 조개미(합구), 변산해수욕장의 방포(막은개), 자미동이 모두 대항리에 포함된다. 우리 동네는 언덕에 천수답 몇 평만 논이지 전부 비탈 밭으로 이루어진 가난한 동네였다. 그렇다 보니, 어촌도 농촌도 관광지도 아닌 어중간한 동네가 되었다. 그래도 한때는 30 가구가 되었고 학생 수도 50여 명이나 되었다.     

뒤안길 바다가 보이는 집(서해안 비안도)

큰 대항리작은 대항리

      지금은 경계가 없어졌지만 마을회관을 사이로 동쪽은 큰 대항리, 서쪽은 작은 대항리로 나뉘었다. 큰 대항리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이 마치 서울 강남이나 되는 냥 작은 대항리 사람들을 무시하곤 했다. 작은 대항리에 사는 나는 큰 대항리에 놀러 갔다가 싸개를 당해 실컷 맞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우리 쪽이 쪽수로 밀렸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항리 마을 회관 

  지금 마을회관 자리는 명당자리였다. 옛날에는 점빵이 있어 ‘점빵 몰랭이’라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주막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마을 회관을 건축하면서 땅을 파보니 엽전 꾸러미와 그릇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와 관련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거기서 동쪽 큰 대항리 쪽을 바라보면 새만금이 보이고 서쪽 작은 대항리 쪽을 바라보면 위도와 채석강이 보이고 북쪽 정면을 보면 비안도가 바로 코앞이다. 

  큰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우리 마을을 꼭 지나야 변산해수욕장이나 격포로 갈 수 있었다. 대항(大項)이라는 지역 이름처럼 이곳은 교통 · 통신 · 군사 요새지였다. 동쪽에는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큰 봉화터인 점방산봉수대가 있어 격포와 계화도의 봉수대와 통 할 수 있는 주요 통신시설이었다. 이곳이 예부터 군사 요충 지라서인지 지금도 대항리 바닷가에는 군인들이 주둔하는 중대본부가 있다.      

작은대항리 현재 전경 (큰 건물뒤편에 필자의 집이 초라하게 보임)

   

아버지는 쬐깐쇠

      대항리는 최(崔)씨 · 하(河)씨 · 한(韓)씨 집안들이 사는 집성촌이다. 필자는 전주 최 씨로 오래전 선대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대항리를 떠나 부안읍내에서 유학을 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할아버지가 사시는 대항리로 들어오셨다.  전쟁이 끝난 1954년경에 군에 입대하여 5년 동안 군 생활하면서 상사계급을 달고 제대를 했다. 제대 후 아버지는 한 동네 사는 처녀와 열애 끝에 다음 해에 결혼한다. 노래에 나오는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면서 사랑했지만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여 갑돌이가 울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노래와는 달리 결혼에 성공하여 60년 6월에 나를 낳으셨다. 그래서 나는 한동네에 외가와 친가가 한집 건너에 있어서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와 고모 그리고 삼촌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아버지의 군 생활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을 복구하는 작업을 맡아하면서 목공일을 배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작고 야무진 체격이라서, ‘쬐깐쇠’ ‘대목쟁이’ ‘부안양반’이라고 다양하게 불렸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키는 작지만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생활력도 강했다. 군에서 배운 목공기술로 변산 해수욕장이 막 개발되는 1970년대에 건물을 많이 지었다. 아버지가 연장 망태기 하나 둘러메고 해수욕장에 가면 목공일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현금이 귀했던 시절이라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좋은 기술과 직업을 갖은것이다. 그러나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 때문인지 대목쟁이는 천민(賤民)이라는 인식이 7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친구들한테 ‘대목쟁이 아들’이라고 놀림도 받았었다.

부모님의 결혼사진

  일을 끝낸 후에도 아버지는 일당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부에서 시공하는 큰 공사는 간조라는 것이 있었는데 간조 때가 되면 현금을 노랑봉투에 한 뭉치씩 들고 오셨다. 간조는 건설노동 현장에서 품삯을 속되게 부르는 말로, 일이 끝나기 전인 중간에 계산하는 용어로 보인다. 제법 목돈이 되었을 때, 평당 1000원씩 주고 농사도 짓지 못할 땅을 3000평 정도 샀다. 지금 변산해수욕장 공용주차장 자리이다. 그때는 늪지대였고 바닷물이 들락거려 농사도 못 짓는 땅이었다. 건달들 꾐에 빠져 샀지만 그 땅도 얼마가지 않아 화투노름으로 날려버렸다. 현금이 귀했던 시절이라 아버지의 현금을 노리는 시골 건달들이 많았다.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하는 반면 친구와 술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해서 다른 사람 꾐에 잘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남의 집 헛간에서 살다

  국민학교 다니던 어느 날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도착해 보니 세간살이는 소달구지에 모두 실려 있고 집에서 키우는 소와 돼지 · 염소 · 닭 등 가축들은 목줄을 모두 묶어 자식들한테 한 무리 씩 맡겨 집을 떠나자는 것이었다. 머리에 이불과 보따리를 이고 있는 어머니를 따라서 영문도 모른 채 살던 집을 놔두고 따라나섰다. 유목민 이동하듯, 전쟁터에서 피난 가듯 나는 소와 돼지를 몰고 집을 떠났다. 도착한 곳은 멀지 않은 작은 초가집이었다. 본체는 친척 벌 되는 주인이 살고 있고 농기구와 창고와 두엄을 보관하는 쓰러져가는 헛간에 짐을 풀었다. 아버지는 연장통을 뒤지더니 기둥뿌리가 쓰러지는 것이 두려운지 대충 망치와 못으로 두드리면서 단단히 고정하고 덕석을 풀어 이부자리로 삼았다. 가축들도 몽고 초원 위의 가축처럼 지붕 없는 풀밭에서 쇠말뚝에 묶여 잠을 자야 했다. 아버지 잘못 만난 가족은 남의 집 헛간에서 살게 되고, 멀쩡한 외양간을 잃은 짐승은 노숙 가축이 되었다. 

남의 집 헛간

      다음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네가 떠나갈 듯 싸웠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화투노름으로 하루저녁에 살던 집을 날린 것이다. 목수 일을 그만 안 두면 집을 나간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어머니는 짐을 싸고 있었다. 우리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다시는 목수 일을 않겠다면서 연장통을 마당에 내팽개치고 석유를 부어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연장통을 안집 주인이 물을 붓고 이불로 덮어 타는 것을 겨우 막았다.

아버지 목수 연장통

 어머니가 집을 나간다 해도 친정이 같은 동네라서 아버지는 걱정을 안 하셨다. 부모님 싸우고 난 다음날에는 어머니를 따라서 외갓집에서 며칠 씩 보낸 일이 허다했다. 

  그렇게 남의 집 헛간에서 생활하면서 대목쟁이 아버지는 그새 새 땅에다가 집을 토닥토닥 짓기 시작했다. 대들보에 상량을 올릴 때 동네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했다. 그 상량 위에 서까래를 하나씩 올리면서 지붕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새집이 완성되자 또 한 번 유목민처럼 대 이동을 해야 했다. 그 사이 짐승도 식구가 늘어 돼지가 새끼 12마리를 낳았다. 새로 지은 집은 마루가 있었고 방이 4개나 되었다. 내 꿈이었던 독방을 가질 수 있었다. 외양간도 돼지우리도 닭장도 새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키에 맞추어서인지 천장도 낮은 아담한 집이었다. 그러나 걱정이 꺼지지 않는 것은 이 집도 놀음으로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낮은 천장과 처마가 불편한지 모르고 자랐다. 다행히 그 후로 아버지는 도박을 끊었는지 집은 온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사위와 며느리까지 봤다. 사위들도 장인 어르신을 닮아 술을 좋아했다. 술에 취한 날에는 처갓집 낮은 처마에 받혔는지 사위들 이마에 남봉이 군대 계급장처럼 여러 개 나있었다. 처갓집 방문 기념 선물인 셈이다.      


앙콜탱이 이야기

      대항리에서 해수욕장으로 1km쯤 신작로를 따라가 보면 깔끄막 진 길이 보인다. 지금 팔각정(전망대)이 있는 곳이다. 해수욕장이 한눈에 보이는 명당자리다. 바로 아래에는 복지호텔이 있었다. 말만 호텔이지 우리가 보기에는 여인숙보다 못한 숙박 시설이었다.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어 사계절 가리지 않고 관광객이 오지만, 70년대는 여름에만 반짝 붐비다가 한겨울에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사람도 없는 패가나 다름없는 을씨년스러운 집이었다. 확 트인 곳이라서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세찬 바닷바람이 불어 ‘복지호텔’ 간판에서 밭침 ‘ㄱ’ 자가 날라 가는 통에 야한 이름의 호텔 간판만 겨울 내내 덜그럭거렸다. 호텔 뒤로 신작로를 건너면 언덕배기 비탈진 야산이 있다. 밭도 없고 길도 없는 잡초와 잡목만 우거진 으슥한 산이었다. 거기에는 산딸기 · 머루 · 밤 · 다래 · 꾸지뽕이 계절마다 우리를 유혹했다. 그러나 웬만한 담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무서운 장소이기도 했다. 변산해수욕장에서 익사 사고 난 사망자를 들것에 옮겨오면 시신은 이곳에 가마니때기로 덮어놓고 유가족을 기다린다. 지금은 핸드폰이나 주민등록증으로 바로 신원을 파악하여 연락할 수 있지만 70년대는 유가족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대항리나 조개미 사람들은 캄캄한 밤에 이 길을 걸어지나 갈 때는 바람만 불어도 소름이 돋았다. 이곳 지명은 ‘앙꼴탱이’었는데 이곳과 관련된 귀신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변산해수욕장에서, 뒷 배경은 복지호텔과 알꼴탱이,사진의 왼쪽이 아버지

  해수욕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밤은 길기만 하다. 어머니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하며 해수욕장 쪽의 앙꼴탱이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걱정을 했다. 가로등도 없는 칠흑 같은 깜깜한 밤에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나와 강아지를 대동하여 아버지 마중을 나가게 되었다. 휴대용 호야등에 석유를 넣어 심지를 올려 불을 밝히고 떠난다. 앙꼴탱이를 막 돌아설 때 산 위에서 바람이 휘~~ 익 불더니 남포등 불이 꺼져 버렸다. 산 위에서는 이상한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고 공포에 질려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섰다. 어머니는 침착하게 각 성냥을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다시 불을 붙였다. 그러나 워낙 바람이 세차서 심지에 불이 붙기 전에 바람이 불어와 또 꺼져 버린다. 무서워서 울고 싶었지만 울지도 못한다. 그렇게 서너 번을 시도하고서 간신히 호야등에 불을 붙이고 복지호텔로 향하여 깔그막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고 있었다. 순간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쓰러져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바람에 날리는 하얀 갈대꽃 윗부분을 한 웅큼 쥐고 계셨다. 손톱은 피 멍이 들고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러내리는 아버지를 간신히 부추겨 세워 집까지 돌아왔다.  

  술이 깨고 정신을 차린 다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일을 끝내고 아버지의 단골술집인 관수정에서 한잔하고 집에 가려고 했으나 이미 해는 어둑해져 맨 정신으로 복지호텔을 넘어가는 것이 두려워 만취될 때까지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호텔입구에 와보니 시멘트로 된 층층계단이 사라져서 언덕을 간신히 기어올랐더니 하얀 수염을 길은 할아버지 한분이 나타나 씨름을 하자고 했다고 한다. 왼발로 걸어서 넘기고 머리채를 잡아 쥐어뜯었다. 그것이 하얀 수염 같은 갈대꽃이었다. 도깨비를 만나면 무조건 왼발로 걷어야지 오른발로 걷으면 진다고 하면서 아버지는 도깨비도 이겼다는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의기양양하셨다. 

귀신이 나온다는 앙꽁탱이

  동네 한 씨 한분도 같은 장소에서 도깨비를 만나 씨름을 하다 오른발로 걷다 넘어지고 집에 돌아와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도깨비한테 홀려서 그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실은 100m쯤 되는 깔그막이었지만 복지호텔 입구까지는 층층계단이 있었고 뒷길 50m 정도는 갈대가 있는 오솔길을 올라가야 신작로가 보인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 계단도 안 보이고 흔들리는 갈대를 헛것으로 보면서 도깨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송 선장의 돛단배와 아버지

  해수욕장 끝나는 지점 구석진 곳에 송포라는 포구에는 작은 목선 20여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는 목선을 만들 수 있는 조선소(造船所)가 있었다. 아버지는 집을 짓는 대목쟁이지만 일이 없을 때는 배 목수 일도 했다. 같은 목수일이지만 집 짓는 것과 배 만드는 일은 많이 다르다. 배에 쓰는 나무는 송진 같은 기름기가 있어 물에는 강하고 불에 잘 휘어지면서 단단해야 되는 삼나무나 금강송 등 특별한 나무를 사용한다. 먼저 배 밑바닥에 용골을 만드는데 한옥에서 상량을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서까래처럼 배도 갈비뼈를 만들어 거기에 나무판을 곡선으로 휘어 붙여서 배를 완성시킨다. 두 달 정도 작업을 하면 5톤급 돛단배 한 척을 만들 수 있었다. 돛은 삼베로 만든 마포를 엮어서 만든다. 삼베는 질겨서 바닷물에도 강하고 바람에도 찢어지지 않는다. 앞에서 바람이 불어도 전진할 수 있는 게 항해술이다. 선장은 바람방향을 정확하게 감지를 하여 돛을 바람 방향과 90도로 펼친다. 돛은 바람의 힘을 분산시켜 선박을 전진시킨다. 나침판을 이용하여 목적지를 정하면 직선은 아니지만 바람만 불면 목적지까지 항해하여 도달할 수 있다. 돛은 바람이 없는 무풍지역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여야 한다. 바람은 적당히 불면 항해에 도움이 되지만 강풍은 선박을 뒤집힐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일하셨던 마지막 목선

배가 완성되었지만 품삯을 받지 못하자 한 달쯤 지나 아버지를 따라 선주인 송 씨 집에 갔다. 송 씨는 품삯은커녕 노발대발하면서 욕만 했다. 배 밑창에서 물이 샌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버지는 바로 연장통을 짊어지고 배에 오르셨다. A/S 겸 품삯을 받기 위해서다. 나도 바가지를 들고 아버지를 따라 올라갔다. 송 씨는 부지런히 노를 저어 송포항을 떠나고 있었다. 나는 배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물을 바가지로 부지런히 퍼냈다. 아버지가 배 밑바닥 틈새에 닥나무 뿌리를 기름에 발라 끼어 넣고 망치로 몇 번 두들기자 더 이상 물이 새지 않았다. 어릴 적에 닥나무 껍질로 팽이채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닥나무는 바닷물에 강하여 틈새를 막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한다. 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쉬고 송 씨도 만족한 표정이었다. 선장인 송 씨는 바람을 잘 이용하여 돛을 올려 배는 순항하였다. 바다는 잔잔하고 갈매기들이 배 주위를 돌고 있었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위도와 비안도는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하섬 뒤에 있는 이름 없는 무인도는 대항리에서 바라보면 꼭 송장이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송장섬이라고 부르지만 격포 쪽에서는 뽕잎을 갉아먹는 누애처럼 보여서 누애섬 이라고도 불렀다. 불교를 믿는 불자는 누워있는 부처님인 와불(臥佛) 섬이라 불렀다. 육지에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섬이 되었다. 배를 타고 가까이 가보니 또 다른 섬으로 보였다.

대항리에서 바라본 송장섬

  송 선장은 삼마이(삼 중막) 그물을 물때에 맞춰 하루에 두 번 투망을 하여 고기를 잡았다. 팔뚝만 한 농어를 수 십 마리 잡는다.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부안읍내를 구경했을 때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는데, 지금 내가 바다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때 감정이었다. 아버지는 농어 수십 마리를 품삯 대신 받기도 했다. 졸지에 어부가 된 기분이었다. 

  고기가 많이 나오는 사리 때가 되면 아버지는 어부 노릇을 하며 송 선장을 도왔다. 뿐만 아니라 배를 수리하거나 개조를 할 수 있어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배를 탔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서 목수와 어부 그리고 농부 이렇게 쓰리잡을 뛰신 것이다. 송 선장은 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 돛단배에 경운기 엔진을 달아 발동선으로 개조하였다. 그는 조석표를 보지 않고도 음력 날짜만 알면 손가락을 세면서 물때를 정확히 알고 나침반과 별을 보면서 정확히 위치를 파악하여 항해를 하고 밀물과 썰물 때 고기들의 진행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는 분이다. 그는 몸으로 채득 한 진정한 항해사이고 어부였다.      

마지막 전어잡이 배     

  세상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다. 변산반도도 변하고 있었다. 짚신은 따듯한 털실로, 지게와 쟁기는 트랙터로, 소달구지가 다니는 길은 4차선 도로가 들어섰다. 해수욕장에서 격포까지 반나절을 가야 하는 거리는 자동차로 10분이면 가는 거리가 되었다. 선박도 목선은 폐선하고 FRP 선박으로 변했다. FRP는 모듈이라는 형틀에 두꺼운 석면포를 액체 플라스틱재료를 몇 겹을 발라 건조하면 딱딱한 플라스틱 배가 되는 것이다. 벽돌 찍어 내듯이 쉽게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다. 집도 철근을 넣고 거푸집으로 막아 펌프 카로 콘크리트를 부어 쉽게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의 대목쟁이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연장통은 창고에서 먼지가 쌓인 채로 주인을 기다리고 흥부의 커다란 박을 잘랐던 톱도 벽에 걸려 녹이 슬고 있었다. 강남 갔던 제비의 보물 박을 기다리듯 연장통이 쓰일 날을 기다리지만, 그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몰랐다.

폐선한 전어잡이 목선

  전어는 먼바다에 살다가 날씨가 선선해지면 굴비의 고향 영광을 거처 곰소만, 위도, 비안도, 동진강, 만경강 그리고 마지막 새만금을 지나 충청도로 올라가는 고기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떼로 지나간다. ‘가을 전어 굽는 냄새로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고’, ‘대가리에는 깨가 서 말’ 들었을 정도로 고소하고 통통하여 지방함량이 3배가 된다고 한다. 

      전어잡이를 위한 새로운 선박은 자동항법인 자이로와 레이다가 설치되어 있다. 배에 탑재된 어군 탐지기는 고기떼는 물론 해류 · 수심 · 온도 · 풍향 · 풍속 등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최첨단 선박이다. 전어 떼를 발견하면 선장은 ‘투망’이라고 외친다. 전어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급선회를 하면서 300m 되는 긴 그물로 전어 떼를 휘감는다. 주어진 1~2분으로 순식간에 전어 떼를 포획한다. 목선은 돛과 노를 저으면서 어장에 도착하여 덫을 놓아 토끼를 잡던 방식인 삼마이 그물 방식인 반면, 선망어선은 고기보다 더 빠르게 그물을 쳐 잡는 방식이다. 목선은 새로운 선박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송선장은 목선 대신 FRP로 바꾸고 나서도 현대화된 전자 장비에 대응을 못하였다. 선박이 급회전할 때는 시간과 속도에 적응도 못했다. 송선장과 아버지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체력이 따라 주지 않았다. 이 선박에 1주일 승선하여 전어잡이를 마지막으로 두 분의 어부생활은 막을 내렸다. 

  아버지와 송선장의 채취가 담겨있을 만한 나무로 만든 어선이 덩그러니 모래 언덕에서 뒹굴고 있었다.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타인에게는 흉물이 될지 모르지만 두 분에게는 삶의 애환이 담겨있다. 품삯이 인연이 되어 같이 배를 타면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두 분의 구부정한 허리와 움푹 파인 주름살은 세월의 흐름을 알려 줬다. 세찬 풍랑과 바닷바람으로 연세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두 분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면서 저녁노을 지는 변산에서 전어회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두 분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필자와 50대 무렵의 부모님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는 어부와 목수 일을 그만두고 농부로 귀환했다. 대항리는 채소가 주 생산물이다. 짭짤한 바닷바람을 맞아 배추와 무가 감칠맛이 있다. 김장 배추를 수백 포기 심어 자식들 김장까지 해 준다. 

  1997년경에 필자는 중국 상해의 배를 만드는 조선소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선박건조를 마치면 바다에서 일주일 정도 해상 시운전을 한다. 망망대해에서 한통의 전보를 받았다. 회사에서 날아온 비보였다. 아버지가 위독하니 귀국하라는 통보였다.


 정신없이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여  대항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뵈었다. 원래 깡마르고 왜소한 체격이지만 더욱 왜소해 보였다. 위암 3기라고 진단을 받으셨다고 한다. 저녁이 되자 아버지는 고통이 시작되는지 진통제 약봉지만 말없이 털어 드신다. 

  아버지는 고통이 잠시 멈추자, 몇 년 전에 지금의 집터가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실토하셨다. 위암 진단만 안 받았어도 되찾아 멋진 한옥을 손수 지어 손자 손녀들이 집에서 뛰어놀아도 이마에 혹이 나지 않도록 높게 지을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주무시다가 고통이 오는지 뒤척이다가 다시 나를 깨웠다. 아버지께서 못다 한 말을 다시 하셨다. “너희 어머니, 나 만나 고생 많았다. 속도 많이 썩어 문드러졌을 거다. 어머니한테 못해 줘서 너무 후회스럽다. 못 살겠다고 도망가는 어머니를 붙잡는 게 일이었지. 평생 동안 ‘사랑한다’ ‘좋아한다’ 한마디 못하고 살았다.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도박도 부질없더라. 너도 사내로 태어났으니 가족을 사랑해 줘라. 어머니한테도 잘해 드리고~”  

  나는 아픈 아버지를 더 이상 돌보지 못하고 현업에 복귀했고 6개월 후 ‘부친사망’ 비보를 듣고 다시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아버지는 그 가냘픈 체구로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험한 세상에서 쉼 없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눈이 내리는 날이나 길바닥이 언 강추위에도 연장통 하나 가냘픈 어깨에 메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집 마당을 나가시는 뒷모습이 생각났다. 내가 하는 지금의 해양 관련 직업도 아버지의 영향과 고생에 힘입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쬐깐쇠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는 일 고만하시고, 편히 쉬셔야지요.” 눈가에 촉촉이 이슬이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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