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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Sep 20. 2024

변산의 60년생 쥐띠들(3)

 반경 2km 내 변산국민학교 풍경, 70년대의 모습

우룡이 집옆에는 대장간이 있어 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어리 두들기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대장간을 지나면 지서리 마지막 자전거뽀가 있었다. 자전거는 그래도 좀 산다고 하는 집에만 있었다. 지금 자동차보다 더 귀했다. 비포장 도로라서 자전거 펑크가 자주 났었다. 낡은 안장도 바꾸고 체인도 바꾸고 브레이크 페드도 바꾸었다. 신사용 자전거를 보조훅쿠를 여러 개 달고 자전거 바퀴를 큰 걸로 바꾸어 짐 자전거로 개조공사도 하였다. 이 짐자전거는 20리터 막걸리 4통은 옆으로 매달고 2통은 짐칸에 실어 밧줄로 묵어 배달을 하였다. 120kg을 싣고 다니는 튼튼한 자전거였다. 가난골 김기곤 삼촌이 자전거뽀 주인이었다. 휘어지고 쓰다 버린 자전거 바퀴 휠(림)을  삼촌한테 얻을 수 있었다. 도롱태(굴림쇠)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 애들이 많이 부러워했다. 지금으로는 최신 아이폰정도 되는 물건이었다. 자전거뽀를 지나면 냇물이 흐른다.  냇가를 사이로 모장동과 지서리로 마을 구분이 되었다. 

지서리 다리건너면 모장도 첫집이 당골래미 집(멀리 변산서중과 부안실업고등학교가 보인다. 옆에는 가난골이다)

개울 건너 첫 집이 무당집이었다. 일치감치 신들린 당골래미였다. 당골은 귀신 이름이었다. 사주팔자를 보는 점쟁이도 아니었다. 주역을 공부한 철학자도 아니었다. 직접 귀신을 불러 굿을 하시고 미례를 예측하시는 분이었다. 울 엄마는 종교는 없지만 당골래미를 믿고 추앙하였다. 당골래미 말씀은 곧 하나님 말씀이었다. 우리 집 식구들 생일날 모두 기억하여 아침 일찍  방문하여 큰 대야에 물을 받고 바가지를 그 위에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한두 시간 주문을 외운다. 하얀 백지를 태우고 마당에서 짚을 태웠다. 액운을 몰아내는 일종의 굿이었다. 식구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였다. 어머니는 당골래미가 왔다 가시면 편안한 마음으로 1년을 보내셨다. 물가를 조심하고 동쪽에서 귀인을 만날 것이라는 예언도 해 주셨다. 당골래미 말씀대로  항상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하면서 살으셨다. 집안의 걱정거리가 있으면 당골래미를 불러 해결하셨다.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당골래미 신통력은 부안까지 알려져 전국구가 되었다. 


지서리와 모장동 사이로 흐르는 냇물이름 지포 계곡이다. 운산리 삼신산에서 시작하여 쇠꼬랑날을 지나 운산리, 중산리, 지서리, 모장동, 사망암을 거처 최종 변산해수욕장 송포항구에 머물다가 서해 바다로 빠진다. 냇가를 건너는 큰 다리 하나가 있었다. 버스가 다니는 다리였다. 다리 건너면 모장동이고 언덕에 운산중학교가 있었다(현 변산서중학교). 다리밑 웅덩이에는 피라미, 송사리, 모래 무치 작은 물고기가 많았다.  냇물이 흐르는 중산리와 지서리 중간에 농업용수를 사용하기 위하여 콩구리(콘크리트)로 막아서 조그만 수문을 만들었다. 어릴 적에는 큰 댐으로 보였다. 댐이름은 없고 큰 웅덩이를 원질래라고 불렀다. 깊은 곳은 사람키보다 깊었다. 학교에서 가까워 시간만 되면 홀라당 벋고 불알만 잡고 물속에 툼벙 들어갔다. 개구리헤엄이지만 수영도 잘했다. 숨 안 쉬고 1~2분은 거뜬하게 물속에서 잠수도 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근질거리는 불알밑을 만져보면 오동토동한 거머리가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원질래를 조금 더 올라가면 버드나무 밑에 조그만 둠벙이 또 하나 있었다. 중산리 저수지 밑에서 솟구치는 물이었다. 여름은 얼음처럼 차고 겨울은 온천처럼 따뜻한 물이나 왔다. 이런 명당자리를 일치감치 어른들은 아내들한테 양보를 해 주었다. 동네 아낙네들의 전유물이 되어 빨래하고 수다 떨고 온천욕을 즐기는 곳이었다. 여자들의 유일한 휴식공간이었다. 그곳은 나무와 숲이 울창하여 바람막이도 잘되었다. 또한 남자들의 시선도 막아 줬다. 밤에는 여성 전용 노천 온천탕으로 바뀌었다. 간판은 없지만 남성 출입금지라는 지역 관습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만약에 어른들이 어른거리면 쓸개 빠진 놈이라고 낙인이 찍혀 동네를 떠나던가 멍석말이 벌을 받아야 했다. 너갱이나 쓸개 빠진 놈은 큰 욕이였다. 그만큼 원질래 여성 노천탕은 변태나 정신 나간 사람한테도 접근이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쥐띠들한테는 엄니 따라갔던 추억뿐이었다. 훌쩍 커버린 것이었다. 어린이도도 어른도 아닌 호기심 많은 사춘기가 되었다. 여성의 알몸이 궁금한 나이가 되었다. 몰카도 야동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고작해야 선데이서울이라는 잡지 모델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어쩌다 미국 포르노 잡지를 손에 쥐면 땅문서보다 귀하게 다루었다. 커닝 페이퍼처럼 몰래 돌려 봤다. 선생님한테 들키면 날리 난다. 대급빡 피도 안 마른 것들이 ~~??? 정말로 대급빡 피날 때까지 맞았다.

 쥐띠 중에서 성숙한 최갱열이가 있었다. 나쁘게 말하면 일치감치 까진 애였다. 지서리 전재인, 옹기골 양영배는 갱열이보다 먼저 까진 쥐들이었다. 3명 소년은 포르노 동지였다. 불량소년들이었다.  재인이가 밤 9시 이후에 이웃집 누님들이 속옷을 싸들고 선녀탕으로 간다는 정보를 주었다. 우리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다. 동화를 리메이크하기로 모의했다. 나무꾼을 위장하여 재현하기로 했다. 나쁘게 말하면 모방 성범죄다. 잡히면 죽는다. 

  3명의 소년은 솜털이 갓 벗어나 검은 수염이 자라고 있는 중학생이었다. 호기심도 많고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무서운 게 없었고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위험한 나이였다. 겁 없는 쥐띠 불량소년은 나무꾼이 되어 선녀를 보기 위하여 버드나무 숲 속 침투 작전을 실행하였다. 어른들도 겁을 내는 작전이었다. 밝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쥐새끼들은 나무 숲 속에 숨을 죽이고 숨어 들어갔다. 매복하여 간첩 잡는 특공대원 같았다. 초롱초롱한눈은 순진한 어린아이의 눈은 아니었다. 드디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왔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네 누님들이었다. 변산에는 사립인 운산중학교(변산서중학교), 부안실업 고등학교(일명연초고등학교)가 같이 붙어 있고 공히 남녀 공학이었다. 여고생은 한 학년에 손에 꼽을 정도 적은 수였다. 70년대 산간벽지 변산에서 여고생이 되는 것은 선택받은 상류층이었다. 우리들의 로망이었고 모두 예쁘고 키도 훤칠하였다. 서울로 치면 이화여대급 대우를 받았다. 

  누님들은 옷을 벗어 바위에 걸어놓고 속옷까지 벋고 알몸으로 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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