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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Sep 19. 2024

변산의 60년생 쥐띠들(2)

변산국민학교 반경 2km 내, 70년대의 모습

집에 갈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정문으로 나오는 것보다 산내면사무소 개구멍을 통과하는 게 훨씬  빠른 지름길이었다. 오른쪽은 우체국이고 왼쪽은 경원반점 중국집이 있었다. 6년 동안 짜장면 딱 3번 먹어본 기억이 있었다. 졸업식날, 간첩신고 표창장 받는 날, 글짓기 대상 받던 날, 그때는 세상에서 최고급 요리가 짜장면인 줄 알았다. 경원반점을 지날 때 구수한 음식냄새를 맡기 위해 우체국 담벼락에서 서성거리며 코를 실룩거릴 때도 있었다. 우체국은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 높은 빨간 기와집이었다. 헤드폰과 마이크를 착용한 교환원 누나들이 보였다. 벌집 같은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비양기 조종사처럼 멋있어 보였다.

산내면사무소(1987년 변산면사무소로개칭)

    학교 운동장 서쪽에는 정문바로 앞에 학교점빵이 있었다. 없는 물건이 없었다. 쥐띠들이 보기엔 문구점이 아니라 대형 백화점이었다. 학교 문구는 물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놀이기구등 초등학생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팔고 있었다. 학생수가 많아 매출도 많았다. 전 학년 600여 명이 넘었다. 언덕 위에 중학생까지 합하면 학교점빵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돈을 긁어모았다. 대기업 제벌쯤 생각하였다. 등록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숫자가 반이 넘었던 시대였다. 가난한 동네였지만 학교점빵 돈통에 돈이 수북하게 쌓여만 갔다. 학교점빵 주인은 우리의 로망이었다. 현금이 귀할 때라 물물교환도 가능했다. 농사진 곡식이나 계란을 가져가면 노트, 크래용, 연필등 학용품으로 교환해 줬다. 계란 두 개면 노트 한 권과 바꿀 수 있었다. 엄니는 학교 미술준비시간에는 현금이 없으면 갓 나온 토종계란 두세 개를 싸준다. 등굣길 5km 되는 자갈길을 뛰고 장난치면서 학교점빵에 도착해서 흔들어본다. 계란 속에서 출렁출렁 물소리가 났다. 너무 흔들었다는 것이다. 상품가치가 없다. 그날도 미술시간에 그림은 못 그리고 연필로 만화만 그적거리면서 글을 썼다. 계란 때문에 쥐새끼 갱열이는 그림은 못 그리고 글쟁이가 된 것 같다. 돈을 긁어모았던 학교 점빵도 한참뒤에 문을 닫았다. 70년대부터 국가정책으로 콘돔을 나눠주며"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그것도 부족하여 80년대는 "잘 키운 딸 열아들 안 부럽다"는 슬로건을 잘 따라줘서 아기를 낳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유효한지 시골에 애들이 없다. 그리고 남아있는 쥐들도 하나 둘 시골을 떠났다. 농사보다 기술을 배운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가리봉동에 터를 잡아 서울쥐가 되었다. 북적였던 학교는 전교생 학생수가 크게 줄어 지금은 50명도 되지 않는다. 학교는 폐교가 되어 격포 초등과 합병이 될지 모른다. 돈을 긁었던 학교 점빵도 문을 닫고 흔적만 남아있었다.


학교점빵 한집 건너에 풀빵집이 있었다. 단팥을 넣은 풀빵은 2개에 10원이었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최고의 간식거리지만 10원은 큰돈이었다. 지날 때마다 침만 꿀꺽꿀꺽 삼키고 빵 굽는 기계만 구경하였다. 전북여객 조수로 따라다니는 외삼촌이 계셨다. 집안중에 그래도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이었다. 삼촌이 나를 많이 이뻐해 주었다. 제수가 좋아 삼촌을 만나면 공짜 버스도 탈 수 있고 삥땅인지 몰라도 100원을 몰래 손에 쥐어 주었다. 버스 조수로 따라다니는 삼촌이 자랑스러웠다. 풀빵 20개를 사 먹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풀빵집을 지나면 이발소가 있었다. 곰보아저씨가 주인이고 수습생인 삼식이는 기술을 배우고 청소하였다.  면도를 하는 이모 한분이 계셨다. 미군이나 카우보이가 사용하던 가죽 혁대에 면도날을 삭삭 문지르면 날카로운 면도날이 된다. 이발사도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좋은 직업이었다. 미장원이 없어 여학생 단발머리도 이발소에서 깎았다. 곰보사장님과 아버지는 잘 아는 사이라서 나는 항상 외상을 주고 머리를 깎았다. 상고머리는 70원 빡빡머리는 30원이었는데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상고머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바리깡으로 스님처럼 시원하게 빡빡 깎고 다녔다. 이발소를 지나면 버스가 다니는 큰길이 나온다. 


학교 가는 길 마지막 큰 길가에 쥐띠 전병갑이네 집이 있었고 길건너에 사촌인 전경수 집이 있었다. 옛날 기와집으로 제법 큰 집이었다. 뱅갑이 집은 마당과 학교 뒤뜰이 브로꾸 담하나로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집이었다. 이로 인하여 객지에서 발령받은 학교 총각선생님들이 병갑이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이러한 든든한 뒷배경으로 6년 동안 반장을 하였고 6학년때는 전체 반장을 하였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반장이 되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그 여파로 변산초등학교 36회 동창회장을 50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회장직을 내놓아도 할 사람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똑똑하고 머리는 좋은 것 같다. 명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기술사 자격이 있다. 전북지구 건축사협회 회장직도 맡았다. 60년 변산 쥐띠들의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병갑이네 집을 사이로 비포장 좌회전하면 바로 왼쪽에 신발가게가 나온다. 1년 후배 유지창이네 집이었다. 운동화, 장화, 검정고무신 신발이 진열대에 가득하였다. 제일 인기 있는 신발은 운동화였고 제일 잘 팔리는 신발은 타이어표 검정고무신이었다. 엄니는 검정고무신 떨어지면 운동화 사준다는 약속을 결국에는 지키지 못했다. 물에 떠날라 잃어 먹지 않으면 1년은 거뜬하게 신을 수 있었다. 운동화를 신기 위해서 이빨로 물어 뜯어봤고 시멘트에 문질러도 봤으나 결국 실패하여 국민학교 6년 동안 운동화를 한 번도 신어 본 적이 없었다. 지창이네 신발가게 앞에는 쥐띠친구 이우룡이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 혼자서 찐빵, 라면, 국수, 계란, 부침개를 파는 분식집을 운영하셨다. 우룡이와 나는 짝꿍이었다. 우룡이 집에 가면 엄니가 찐빵과 라면을 반으로 나눠주면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당부하셨는데 제일 많이 싸웠던 친구가 우룡이었다. 불알친구라서 지금도 옛날 이야기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우룡이가 50년 만에 아버지에 대하여 나한테 들려줬다. 할아버지 집은 광주였는데 일제 때 변산으로 피난 와 임시 거처를 하셨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독립군이며 시인이며 작곡가였다. 그리고 우룡이 아버님도 유명한 교수이며 작가였다. 전쟁이 끝나고 변산을 떠나고 나서 연락이 두절되었다. 최근에 연락이 되었다고 하였다. 뼈대 있는 집안 피가 흘렀던지 우리 쥐띠 우룡이도 7급 법원검찰정에서 근무하고 5급으로 퇴임하여 서울에서 유명한 법무사를 하고 있다. 출세한 변산의 쥐띠 인물 2호이다. 

우룡이 집 옆은 넓고 큰 주조장과 방앗간이 있었다. 명절이 되면 떡 빼는 방앗간은 줄을 서야 했고 평상시에도 막걸리 발효 냄새가 향긋하였다. 막걸리를 빚고 남은 찌개미는 돼지를 줬다. 지서리에서 주조장에 뒤뜰을 통하면 제법 큰 오솔길이 있었는데 사망바위 가는 길이다. 100m쯤에 동창 쥐띠 최필열, 조동진, 김영곤이가 살고 있었다. 이 동네는 집이 세 가구가 있어 세 가구똥이라 불렀다. 동진네 집에 기르는 수퇘지가 발정이 났다. 동진이가 막걸리 찌개미를 얻어와 돼지에 먹였다. 술 취한 돼지는 흥분하여 소리를 꽥꽥~~  지르더니 돼지우리를 탈출하여 동네에 있는 암퇘지 우리를 침법 하여 강간을 하고 도망쳤다. 두들겨 맞을 까봐 밤이 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아 마을사람들이 돼지 소탕작전을 벌여 겨우 잡아다 돼지우리에  잡아넣었다. 발정 난 숫퇘지에게는 막걸리 찌개미를 줘서 안 된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사진출처 : 브라이언베리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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