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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Oct 03. 2024

옹기골 (6)

고사포에 우리 쥐띠 친구들만 열댓 명이 살고 있었다. 김유진, 김철상, 김종순, 홍석순, 채희동, 서상교, 채희성 등, 희성이 집옆에는 큰 옹기굴이 있었다. 큰 아궁이가 있어 거기에서 크고 작은  항아리가 쏟아져 나왔다. 운송수단은 구루마나 리어카였다. 개인 옹기장수는 지게를 사용하였다. 지게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옹기그릇은 예술이었다. 제일 밑에는 어른 키만 한 똥통항아리, 그위로 간장통, 된장통, 고추장통이 올라갔다. 그 끝은 어른키 두 배였다. 옆으로는 요강, 젓갈통, 막걸리통, 떡시루통, 콩나물 통등 작은 통을 올려 노았다. 마치 항아리 진열장 같았다. 왜소한 지게꾼은 짝대기는 왼손, 오른쪽 무릎을 고정한 다음 무게 중심을 이용하여 왼발과 등에 힘을 주어 뿔껑 들어 올린다. 다음은 짝대기를 틍태 밑에 집어넣어 발란스를 조절하면서 이동한다. 흔들거리다가 중심을 못 잡으면 와장창 항아리가 깨질 수 있다. 한 달 일당이 날아갈 수 있다. 노련하고 왜소한 지게꾼은 세월의 무게처럼 얼굴에 깊은 주름이 많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밸런스를 잘 조절하였다. 지게는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집을 질 수 있는 경이로운 운송도구였다.  6.25 전쟁 시에 길이 없는 고지까지 지게부대들이 폭탄을 옮겨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항아리를 굽고난 토굴 속에는 며칠은 뜨뜻한 훈기가 남아 있었다. 고사포 애들은 아궁이 속에 기어 들어가 게임 놀이방을 만들었다. 쌈치기, 군기 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등 그 속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자연 황토찜질방이었다. 땀이 나고 놀다 지치면 그을린 숯으로 얼굴과 온몸이 시꺼먼 오소리가 되어 기어 나왔다. 천연 숯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고사포 친구들이 건강한 이유를 알았다.

고사포는 행정구역상 운산리에 속하는 조그만 동네지만 면적과 인구는 운산리보다 훨씬 큰 마을이었다. 항아리를 생산하는 토굴은 감촌이고 흙을 퍼오는 곳은 노루목과 가난골 사이 언덕 두루마치이다. 항아리를 만들기 위해서 좋은 흙은 필수이고 땔나무가 풍부하고 운반할 수 있는 교통이 좋아야 한다. 장작 중에서도 숯이 덜 생기고 높은 온도를 낼 수 있는 소나무를 선호했다. 고사포는 이 세 가지를 갖춘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었다. 항아리는 가까운 부두 성천을 통하는 바닷길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천도 고사포에 속해 있었다. 두루 마치 흙은 곱고 미세하여 고온에 견디어 단단한 질그릇이 되었다. 대장간은 쇠를 불과 물의 성질을 이용하여 단단하게 만들었고 항아리는 흙을 불과 물의 조화로 만들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고 불은 위로 타오르는 성질을 잘 이용하여 옛 선조들은 쇠와 옹기의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항아리는 미세한 구멍으로 숨을 쉰다고 하였다. 음식이 변질이 안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옹기그릇은 한민족의 서민의 발효 음식과 함께 함께 발전해 왔다. 김치, 젓갈, 고추장, 된장 모두 항아리에 오래 보관하여 발효시킬 수 있었다. 옹기그릇은 깨지지 않으면 반영구적이다.  인간과 자연환경에게도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반면 플라스틱 용기는 열에 약하며 환경호르몬 방출로 문제가 많다. 흙속에 들어가도 300년 동안 썩지 않는 물질이다. 옹기그릇은 이러한 좋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다루기 어려워 플라스틱 용기와 냉장고에 밀려 일반 가정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변산의 옹기 기술은 전수자도 계승자도 사라졌다.

 변산에서 원조 옹기 굽는 곳은 지동리 옹기골(일명 띠빠동)이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고 고사포에서는 7080년대까지 생산을 하였다. 띠빠동은 잔디를 뙤라고 하는 사투리에서 지역이름이 나왔다. 이곳은 옹기보다 원래 잔디가 많아 묘지를 쓸 때 띠빠동에서 잔디를 많이 재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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