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열 Sep 20. 2024

변산의 60년생 쥐띠들(5)

변산면 최초의 종합병원

우체국 옆집에 허름한 초가집이 있었다. 처마에 "안창당"이라는 초라하게 간판이 걸려있었다. 한문으로 적힌 한약재료가 천정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수십 개 되는 작은 서랍에도 약초가 가뜩하였다. 약방을 지나갈 때 한약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약방의 주인은 나이가 드시고 소아마비인 듯 약간 절둑거리며 항상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계셨다. 침도 놓고 주사도 놓았다. 종기가 났을 때 쇠젓가락처럼 큰 대침으로 수술을 하셨다. 바늘보다 긴 장침을 진맥을 짚고 아픈 곳이 있다면 쑥쑥 집어넣었다. 다리가 삐거나 허리 아픈 시골사람들은 침의 효과를 많이 봤다. 청진기를 이용하여 아픈 배도 진단하였다. 눈에 이물질도 빼주고 앓던 이빨도 빼주었다. 견적이 많이 나오는 금이빨 시술도 하였다. 외부로 돌출된 치질이나 종기도 수술하였다. 임질 매독도 치료하였다. 돼지나 소불알도 까고 동물도 치료하였다. 어린애들 홍역이나 감기도 치료하였다. 80년 초 변산면 보건소가 생기기 전에는 그야말로 한의사, 수의사, 안과, 치과,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비뇨기과등 종합병원이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대에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낙후된 치료나 처방일지 모르지만 그 시절 안창당 약방의 치료 효과를 본 주민들이 많았다. 잘 사는 집이라도 당시에 암 같은 큰 병으로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모든 제산 탕진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사망한 사연도 많았다. 옛말에 큰 병과 재판은 살림 망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에 이런 시골 초가집 종합병원이 활약을 하여 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했다. 갱열이는 독사에 물려 안창당에서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광진이는 배가 아파 죽기 직전 토끼똥 같은 알약을 먹고살았다고 했다. 어린 아기가 급체했을 때 안창당에서 목에 걸린 음식을 꺼내어 생명을 구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프라시보효과라는 의학용어가 있다. 가짜약을 좋은 약이라면서 환자에게 처방하여 먹인다. 환자는 의사말을 믿고 산다는 확신으로 엔도르핀이 생겨 정말로 병이 호전되는 의학적인 실험결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의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잘되었는지 세계적인 수준이다. 아무리 큰 병도 살림 말아먹을 일은 없다. 안창당은 70년대 변산에서 화려하게 의료활동을 하다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면허 의료행위로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수 있었다. 가난골에 살고 있는 최 씨 집안의 정의에 불타는 청년이 있었다. 군대를 갔다 오더니 워카발로 안창당을 쳐들어가 작살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바로 옆에 산내면 지서가 있었다. 경찰 수사도 안 했다.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몰랐다. 안창당은 변산 역사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약방 주인은 전주로 도망갔다고 했다.


지서리 동쪽에 마지막 집은 교회와 떡 방앗간이었다. 평소에는 참기름이나 고춧가루를 빻았다. 선반에는 참기름을 짜고 난 깻묵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굣길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기 위해서 쭈그리고 앉아 기름 짜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불쌍하게 여겼던지 방앗간 주인이 깻묵 반절을 잘라 던져줬다. 운이 좋았다. 따끈따끈하고 고소한 깻묵을 쥐새끼 친구들과 야금야금 나눠 먹으면서 대항리까지 걸어왔다. 고소한 깨소금 하굣길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사진출처:서울약령시 한의박물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