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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Nov 15. 2024

58년 개띠들

지공파 

1958년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왔다. 매서운 한파가 왔다. 6.25 전쟁이 끝난 지 5년이 흘렀지만 곳곳에 흔적은 남아 있었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복구가 한참이였다. 농촌도 전쟁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나무가 없는 민둥산은 전쟁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아름드리 고목나무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시골의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였다. 생활은 궁핍하고 삶은 고달팠지만 36년 일제핍박과 3년의 6.25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화로운 시골마을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비옥한 땅도 이제는 주인을 찾아 활기를 띠고 있었다. 전쟁 중에 많은 남자들이 희생이 되었다. 토지도 장남이 상속받고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고 일할 수 있는 남자들이 더 많이 필요했다. 이때부터 남존여비, 즉 남아선호사상이 시작이 되었다. 수렵생활하는 원시시대에서 나타 나는 현상이다. 1958년은 대한민국도 전쟁 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원시시대와 같았다. 국민소득은 100달러에도 못 미치는 극빈국가였다. 필리핀이나 베트남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다. 건실한 남자들은 전쟁 중에 전사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는 부계사회였다. 남자가 끊기면 집안의 족보가 사라지는 것이다. 집안의 대를 이어가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하는 남자가 필요했다. 유교사상과 농경에 의존하는 사회에서 더욱 남아 선호사상은 공고해졌다. 3대 독자는 국민의 4대 의무인 국방의 의무도 면제해 주었다. 딸을 낳으면 고개를 못 들고 살았고 어쩌다 딸~딸~딸~ 줄줄이 낳았다 하면 소박을 맞아야 했다. 아들 잘 낳는 첩을 집안에 들여와도 묵인해줘야 했다. 아들을 줄줄이 낳거나 쌍둥이라도 낳으면 집안의 경사이며 문중의 자랑거리였다. 쌍둥이 하나는 아들이 없는 형제에 양자로 보내 주어 그 집안의 대를 이어 줬다. 58년경은 아들이 많고 땅이 많으면 최고의 갑부였다. 


 초가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호롱불이지만 아궁이에 따듯한 금불이 타고 있었고 굴뚝에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초가집에서 가냘픈 어린애기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58년 개띠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미리 아들을 낳을 거라고 작명했다. 한봉철(韓捀哲)이었다. 원래 한자는鳳(봉황 봉)鐵(쇠 철)은 봉학처럼 새의 우두머리로서 쇠처럼 단단하라는 의미였다. 한글도 제대로 못 읽은 한 씨는 어려운 봉철이름을 면사무소 직원이 시키는 대로 그냥 봉철(捀哲)이라 썼다. 그 후 한 씨 형제자매 모두 봉자 돌림을 썼다. 할아버지께서 전쟁터에서 본 쇠로 만든 봉황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봤다. 비행기였다. 할아버지의"봉"자의 집착으로 식구들 모두 이름에 "봉"자가 들어갔다. 봉철, 봉자, 봉숙, 봉기, 봉석, 봉주~~ 줄줄이 애들을 낳으면서 대한민국도 이제 평화의 문의 열린 것이다. 58년, 이때부터 인구가 팽창되기 시작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경사라는 표시로 금줄을 걸었다.  금줄은 아기가 태어나면 부정과 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타인을 출입금지시키는 안전띠이다. 아들이라는 표시로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서 튼튼한 빨간 고추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싱싱한 소나무 잎과 검정숯도 매달았다. 싸리문 양쪽에 길게 늘어놓아 누가 봐도 아들이었다. 한 씨뿐만 아니라 그해 태어난 아이가 한 마을에서 아들 딸 도합 열댓은 되었다. 온 동네가 아이들 세상이었다. 이때를 베이비 부머 시대라고 불렀다.  6.25 전쟁 중에 200만 명이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한민국은 젊은 남성이 필요했다. 봉철이는 이름은 있었지만 58년에 나았다고 개띠 오팔(opal)이라 불렀다. 큰아들 오팔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지은 나무로 판자로 된 건물이었다. 6.25 전쟁 때 다행히 불에 타지는 않았다. 갑자기 불어난 학생들 때문 교실이 부족했다. 책상도 부족했다. 교실에서 책상과 흑판에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은 행운이었다. 일부학생들은 미군들이 군용으로 사용했던 텐트를 치고 땅바닥에서 수업을 하였다. 늘어나는 학생들 때문에 오전반 오후반 이부재 수업을 했다. 미군에서 지원해 주는 덩어리 우유와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과 죽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지원덕택인지 몰라도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58년 한 해에 태어난 개띠가 90만 명이며 해마다 늘어가고 있었다. 서울의 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20 반이상이 수업을 받았다. 한 학년에 1000명 이상이 되었으니 전 학년 만 명이 되는 국민학교가 대부분이었다.

전쟁이 끝난 시점이므로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국민교육헌장은 물론 애국가 4절을 줄줄이 외워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줄줄이 외웠다. 보리밥 먹기 운동, 새마을운동,  쥐 잡기 운동,  보리밭 밟기운동,  국가에서 지시하는 운동도 많았다.  인구가 기하급수로 팽창하니 국가에서는 감당을 못하여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전국적인 운동이 시작되었다. 

봉철이가 5학년쯤 교실은 시멘트 건물로 지어 올라갔다. 최신식 미끄럼틀과 시소등 놀이기구도 운동장 구석에 설치하였다. 그걸 한번 타보기 위해서 수백 명이 긴 줄을 서야 했다. 오팔이는 그때부터 경쟁의 시대에 도래한 것을 느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 치열한 입시공부를 해야 했다.

봉철이가 중학교 입학시험 때  박정희 대통령 아들도 58년 개띠였다. 박지만 씨였다. 우연인지 몰라도 58년 개띠부터 중학교 무시험 제도가 시행되었다. 한마디로 뺑뺑이를 돌려서 중학교를 배당받았다. 중학교 평준화 가 시행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막강하였다. 공부 못하는 박지만 씨를 위해서 중학교 입학제도를 바꿨다는 루머도 있었다. 그 바뀐 제도로 봉철이도 중학교를 쉽게 들어갔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일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격동의 80년대를 맞이하였다. 많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대한민국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모두 58년 개띠 베이비부머 세대 덕분이었다. 대한민국의 주역인 58년 개띠는 지금 "지공파"가 되었다. 지하철 공짜로 타는 65세 이상인 사람을 일컫는다. 정년 퇴임을 하고 위로는 90세 노부모를 모시고 자녀들 결혼시켜야 되고 손자손녀 돌봐야 되는 나이이다. 58년 개띠 주역이 이젠 낀세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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