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감상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삶과 죽음, 그리고 아들러를 생각하다
2025년을 살아가는 청년인 나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다소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노르웨이의 숲』을 다 읽고 난 후, 내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남은 인물은 단연 나오코와 미도리였다. 둘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삶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스며들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달랐다. 나오코가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면, 미도리는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이 두 사람을 보며 알프레드 아들러가 『인간이해』에서 말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떠올렸다.
아들러는 인간을 바라볼 때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중요하게 보았다. 그는 비관주의를 단순히 우울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으로 설명했다. 비관주의는 삶의 문제 앞에서 물러서고, 책임을 회피하며, 결국 현실을 도피하는 태도였다. 반면 낙관주의는 문제가 있어도 정면으로 맞서고, 삶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려는 태도를 의미했다. "결국 인간은 선택한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한다.
이 시선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바라보면, 나오코와 미도리는 단순한 인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나오코는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자신이 짊어진 트라우마, 죄책감, 삶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버거운 곳이었다. 나오코의 고통은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삶'이 제시하는 문제들 앞에 끝내 물러나버렸다. 나오코의 세계는 점점 좁아졌고,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슬프게도 단 하나였던 것이다.
반면 미도리는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삶을 껴안는다. 가족의 죽음, 병든 아버지, 사랑받지 못한 기억들을 품고 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웃고 사랑하려고 애쓴다. 미도리에게도 세상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살아가려 한다. 이 '그래도'야말로 아들러가 말한 낙관주의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나오코일까, 미도리일까?
아니, 우리 모두는 둘 사이 어딘가를 오가며 살고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 이제 서른을 넘긴 내가 사는 이 사회는 분명 쉽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도 벌써 오래전이고, 지금도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디며 버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자주 절망스럽다. 그래서 때로는 나오코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미도리처럼 '그래도' 웃고, '그래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들러는 인간에게는 "지금 이 순간 다른 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완벽할 수 없어도, 실수할 수 있어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 자유.
『노르웨이의 숲』을 읽으며 나는 다시 깨달았다. 우리는 매일같이 죽음과 삶 사이를, 비관과 낙관 사이를 오가지만, 결국 어떤 선택을 할지는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나오코를 사랑하면서도 미도리에게 끌려갔던 와타나베처럼, 나 역시 완벽하게 한쪽만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 쪽으로, 미도리 쪽으로, '그래도' 나아가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