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론>으로 익숙한 존 로크는 <리바이어던> 속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자연상태를 원용한 토마스 홉스와 달리 이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법에 따라 평온자약한 자연상태를 누리기를 원용한다.
한편, ‘홉스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공식으로 말미암아 그를 편집증적인(paranoid) 문필가로 쉬이 오인하듯, ‘로크=평온자약한 자연상태’를 원용한 인물이라 재단해서는 안된다.
좌: Baptism of Pochahontas, 우: 미국 국회의사당(US Capitol Rotunda) 내부. 포카혼타스 그림은 우측 하단에서 볼 수 있다.
Pocahontas Statue in Jamestowne
이 둘은 엄연히 상이한 환경을 전제로 좋은 정부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홉스의 경우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 왕위계승으로 혼란스럽던 영국과 유럽대륙을, 그리고 로크는 17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영국이 식민지 개척을 시작한 북미대륙(특히 버지니아 일대와 제임스타운)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리바이어던>과 <통치론>을 조금만 더 읽어보면 알 수 있다. 홉스의 경우 엄연히 위태로운 자연상태에도 불구하고 좋은 정부를 구성할 방법에 대해 실증적으로 1장과 2장에서 풀어내고자 시도하고, 자신이 이 글을 집필한 의도를 기독교 순수성을 참칭하는 설교자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3장과 4장에서 풀어낸다. 왕당파의 입장에 저술했던 홉스는 역설적이게도 3장과 4장의 내용으로 인해 왕당파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로크의 경우, 광활한 공유지에서 자신의 노력을 투입한 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원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입법을 통해 소유권을 조율할 수 있다는 점을 광활한 공유지의 아메리카를 상정한 채 기술했음에도 [1][2],명예혁명 이후의 영국 독자들(과 의회파)에게 특히 환영받는다 [3].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말로 받아들여져 각광받게 된다 [4].
그렇다면 오늘날 국제관계 속에서 이성을 통한 로크의 평온자약한 자연상태를 원용할 수 있을까?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는 오히려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느 나라의 정부의 신민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즉 자유민으로 태어날지라도) 명백한 국경과 정부의 행정고도화로 인해 어떤 정치체에 자신을 가입시킬 것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정부를 창설하는 실례가 빈번히 관찰되던 로크가 살던 시기와 달리, 새로운 정부를 창설하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 당시 풍부했던 양질의 무주지(혹은 공유지)들은 이미 일국에 의해 점유되고 있거니와, 정부에 필수적인 인구와 세수 마련은 소규모 인원으로 마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버지니아 출신)가 세운 북수단 왕국 위치,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디즈니에서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왔지만 제국주의가 남긴 상처를 희화화한다는 논란이 일어 무산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는 이미 지구촌이라는 말처럼 물리적으로는 떨어져있되, 정신적으로는 서로 묶이고 가까워지고 있다. 기존의 서사와 체계가 더 공고히 되고 증권화(securitization) 되는 이상, (그리고 위기가 도래하지 않는 이상) 신생국가가 탄생할 소지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Savages - <Pochahontas> 中
여기서 로크는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혁명을 제시한다. 부득불 채택할 수밖에 없다 원용한다. 한편, 이렇게 되면 역설적이게도 이성을 통한 자연상태 속의 합의를 달성하기는 더욱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단문의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생각할 거리와 상상할 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1]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에서든 세속의 역사에서든 일단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태어난 지배권과 자신들이 자라난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기에 더 이상 복종하지 않고 다른 곳에 새로운 정부를 창설하였다는 실례만큼 빈번히 관찰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초창기에 많은 소국들이 그런 식으로 출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들의 수는, 좀 더 강력한 나라 또는 운이 좋은 나라들이 연약한 나라들을 집어삼킬 때까지는, 충분한 공간이 있는 한 항상 증가해 왔다. 그러다가 큰 나라들 역시 해체되어 소국으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가부장적 주권이론을 부정하는 반증이 되며, 초창기에 정부를 만든 것은 아버지의 자연권이 그의 상속인에게 전해진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주권이 세습된다는 논리로는 그토록 많은 작은 왕국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가족과 정부(기존의 정부가 어떤 형태든지 간에)로부터 자유롭게 떨어져 나와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독자적인 국가나 다른 정부를 세울 수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하나의 보편적인 군주제로 남아 있었어야 함이 분명하다. (로크 통치론 p.111)
[2]
그렇다면 정부 자체의 관행에 의해서건 올바른 이성의 법에 의해서건 자식은 어떤 나라나 정부의 신민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는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후견과 권위에 복종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자신을 어떤 정부하의 복종시킬 것인지, 어떤 정치체에 자신을 가입시킬 것인지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된다. 만약 프랑스에서 태어난 영국인의 아들이 자유롭고 또 그렇게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면, 그의 아버지가 이 왕국[영국]의 신민이라는 사실이 그에 대한 구속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는 그의 조상이 맺은 협정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설사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자유를 가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가 본래 그의 자식에 대해서 가지는 권력은 그 자식들이 어디에서 태어나건 동일한 것이며 자연적 의무라는 유대는 왕국이나 공화국(commonwealth)의 실정법상의 제약에 의해서 구속받지 않기 때문이다 (로크 통치론 p.113-4)
[3]
정부는 앞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 다른 기원을 가질 수 없으며, 정치체는 인민의 동의 이외에 다른 어떠한 기초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야심 때문에 세계에는 무질서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 역사의 커다란 부분을 구성하는 전쟁의 소음 속에서 이러한 동의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무기의 위력을 인민의 동의로 잘못 생각하였으며, 정복을 정부의 기원 중 하나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치 집을 허무는 것과 새로운 집을 그 자리에 짓는 것이 서로 너무나 다른 일인 것처럼, 정복은 정부를 설립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사실 정복은 이전의 국가를 파괴함으로써 종종 국가의 새로운 틀을 짜기 위한 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인민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국가가 결코 수립될 수 없다 (로크 통치론 p.167).
[4]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본래 자유로우며, 그 자신의 동의를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그를 지상의 권력에 복종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한 인간의 어떤 정부의 법률에 복종하는 신민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동의의 선언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고려해보아야 한다. 보통 동의는 명시적 동의와 묵시적 동의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어느 누구도 사회에 들어가겠다는 어떤 사람의 명시적인 동의가 그를 그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이자 그 정부의 신민으로 만든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려움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관련하여 제기된다: 무엇을 묵시적 동의로 간주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만큼의 구속력을 가지는가? 곧 어디까지 어떤 사람이 동의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어떤 정부의 영토의 일부분을 소유하거나 향유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럼으로써 묵시적 동의를 한 셈이며, 적어도 그러한 향유를 지속하는 동안, 그 정부하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그 정부의 법률에 복종할 의무를 진다고 말하겠다. 그러한 향유가 그와 그의 상속인을 위한 영구적인 토지소유이건, 단지 1주일 동안 머무르는 것이건, 단순히 대로상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 정부의 영토 내에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에게 복종의무가 미친다고 할 것이다 (로크 통치론 p.1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