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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eatriz Nov 28. 2024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존 로크  Response Paper

좌: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 우: 존 롤프와 포카혼타스
존 로크

분명 존 로크의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제2정부론])>을 오늘날의 국제관계의 선상에서 적용하기에는 애로사항이 있는듯하다. 나아가 그를 제국주의자의 화신이라 말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로크는 어디까지나 영국의 헌법적 용어로, 외국세력과 교류할 수 있는 왕의 특권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활한 공유지를 상정한 채 소유권을 피력한 그의 글이 역설적이게도 명예혁명 과정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그 이전에 로크가 신대륙의 개척지 캐롤라이나 일대의 주(province) 헌법을 제정하면서 <통치론>은 이 영향을 부득불 많이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럼에도 로크는 새로운 권력을 정의하지 않았고, 의회와 같은 전례 없는 대리인에게 '연방' 권한을 구현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입법권한은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법률을 만드는 권한이지만 간헐적으로만 회기 될 뿐이었다.

법률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항상 존재하는 권한'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로크에게 이 권한은 어디까지나 조약 또는 성약(foedus)을 체결하는 권력을 의미했다. 나아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관리되도록 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신중함과 지혜에 맡겨졌고 요구됐다'. 행정권의 소유자가 행사해야 할지라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의미하지 않았음에도, 후대의 권력 분립을 논의할 때 그의 구별은 무시됐다.

물론 이 당시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를 포함한 신대륙과 본국 간 오간 서신에서 신대륙을 '지금까지 경이롭지 않은 지역이지만, 일부 지역에는 특정 야만인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라 표현하기도 했다.

부당한 상태의 '광활한 토지'를 신의 명령에 따라 경작하기를 내포한 이 표현은 미국 땅에 대한 유럽의 지배를 주장하는 농업주의자들의 고전적인 이론적 표현이 되었다. 나아가 이는 영국왕실의 보조금 조건에 따라 캐롤라이나 토지에 대해 소유자가 주장하는 권리의 기초가 된다.

사담이지만 계몽주의 문필가들이 이러한 분류를 행했다고 해서 곧장 오만하다 생각해서는 안된다. 토지경작에 대한 신의 명령을 원용한 농업주의자의 발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농업에 종사하는 정주민이 유목민보다 고도의 의결활동을 할 수 있다고 분류했다. 나아가 원만한 인구확충을 위해 남녀 간 생식능력을 고려한 나이차이가 현격한 남녀 간 결혼을 권장했다. 이들에게 곧장 우생학과 같은 잣대를 들이밀어 평가하는 것은 도리어 오만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후발대 영국인이 신대륙 선발대 스페인인에게서 배운 것처럼, 정복 주장은 원주민에 대한 제국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을 뿐, 아메리카 땅에 대한 지배권은 정당화할 수 없었다. 영토의 고유한 권한을 인정해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선 상에서 인정됐다.

다시말해, 당시의 영토 소유권을 향유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은 종교의 선택과 관용을 행할 수 있는 최대의 자격이 요구됐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불신만으로는 지배의 정당성을 제공할 수 없다.

로크도 <관용에 관한 편지(1685)>에서 이와 동일한 주장을 지지한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종교 때문에 지상의 즐거움을 박탈당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의 지배를 받는 미국인들조차도 우리의 신앙과 예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체나 재산으로 처벌받지 않습니다.' 피력한다.

또한, 종교의 상호간 인정을 통한 소유권을 원용한 것처럼, 로크는 합리적 사고의 보유 여부에 따라 유럽인과 원주민의 구별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그는 신대륙 원주민들을 바베이도스를 거쳐 영국에 방문하기까지 함께 동행하면서 유럽인만이 우월한 문화적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지양했다.

로크의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원주민의 합리적 능력에 대한 의 개념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오히려 자연적 이성의 도움으로 그들(원주민들)은 철학자들이 공부와 독서로 얻을 수 없었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통치론의 초반부(제2정부론 중 1차)에 로크가 토착민들을 ‘비이성적’이라 불렀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지혜를 칭찬하는 수단으로써 이를 사용했다.

그는 “비이성적이고 교육받지 못한 주민들이 자연을 따라 사는 숲(혹은 야생)이 전형적인 권위자에게 길을 내주는 문명적이고 합리적이라 자처하는 도시와 궁전보다 우리에게 규칙을 알려줄 수 있다.”라 표했다. 요컨대, 로크는 신대륙인과 유럽인 사이의 더 근본적인 차이는 지적능력의 척도가 아닌, 우연한 상황(accidental)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했다 [2].

로크는 정신적이든 아니든 비합리와 무능력, 그리고 문명의 서열화를 이유로 (원주민과 개척민의) 소유권 박탈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노동의 결실에 침해하지 않는 한,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의 근면함을 행사해 소유에 대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었다. 이성이 정한 범위 내에서 재산축적이 행해진다면, 확립된 재산에 대한 다툼이나 분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영토확장하는 미합중국의 제국주의적 행위를 설명하고, 오세아니아 일대 국가를 건설한 영국인들 행위의 잘잘못을 따질 때, 오직 로크의 주장에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너무 과도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를 자의적으로 원용한 사람들이 책임비중이 더 크지 않을까..?

Fine


[1]

중년 이후의 로크는 종종 친구들에게 캐롤라이나로 가서 살아야겠다고 농담했지만, 그가 서머싯(somerset, 영국 바스(bath) 인근을 통칭한다)을 벗어나 캐롤라이나를 방문하기까지는 30대 초반을 넘어서 자신의 후원자의 가정교사로 방문하게 된다.


[2]

버지니아 왕 아포찬카나(Apochancana)가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는 아마도 영국에서 누구보다 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수학에 능숙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점이 없다면 영국인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된 것처럼 비합리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특정한 인간의 발명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책이 없다면 우리는 신체만큼이나 정신도 형편없는 인디언처럼 무지할 것입니다. (존 로크, ‘Of Study’ p. 367.)


<읽은 문헌>

- 존 로크 <관용에 관한 편지> (공진성 역. 책세상)

- Armitage, David. Foundations of Modern International Thought (Cambridge, 2013), Chs. 5, 6, 7 (pp. 75-134)

- Tuck, Richard. The Rights of War and Peace: Political Thought and the International Order from Grotius to Kant (Oxford, 1999), Ch. 6 (pp. 166-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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