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나 Jan 26. 2024

나의 선한 외할머니 2

할머니의 작은 대나무숲


내 나이 고3의 여름방학, 그 중요한 시기는 더위와 졸음과의 전쟁이었다. 집은 너무 덥고 독서실에 가면 시원해서 잠이나 쿨쿨 자고,, 엄마는 할머니 댁에 가면 시원하니까 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환경을 바꿔보면 좋을 거라는 생각에 책을 싸들고 올라갔다. 할머니집에는 남는 방들이 많았다. 대문 바로 옆에 있는 큰방을 내주시고 책상으로 쓰라고 밥상을 놓아주셨다. 그리고 시원한 미숫가루도.

할머니집은 선풍기 에어컨이 없어도 너무 시원했다. 그리고 너무 조용했다. 들리는 건 오로지 방 맞은편에 있는 화단의 대나무 바람소리뿐. 문풍지를 발라 놓은 커다란 창을 열면 방에 앉아서도 마당과 대나무가 보였다. 그냥 왔다갔다 할 때는 몰랐었는데 대나무가 빼곡하게 모여 스스스 스스스 하면서 바람에 소리를 내는 것이 신기했다. 공부는 30분으로 이미 끝났고, 시원한 바람과 그 음산한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잤다. 할머니가 방문을 여는 소리에 깼는데 좀 무안했다. 공부하러 와서는 잠이나 쳐 자는 막내 손녀가 참으로 한심해 보였을 텐데,,

어찌어찌 대학을 가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 들었던 대나무 바람소리는 잊히지가 않는다. 스스스 스스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장소가 대나무숲이었다는데,, 스스스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외침은 대나무 바람소리에 묻히고 대나무숲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았을 거라는 게 이해된다. 할머니집 대나무숲은 내가 학창 시절 대박 잠꾸러기였다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려나.





할머니 생신날이 되면, 아침 일찍 선물을 들고 할머니댁에 갔었다. 아침부터 동네 할매 할배들이 그곳에 다 모여있다. 방이 4~5개쯤 있었는데 그 방들을 꽉 채울 정도였다. 모두들 모여 앉아서 할머니의 생일밥상을 함께 했다. 그런 게 잔치였다. 할머니의 생일잔치. 우리는 손주들이니까 안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미역국과 팥밥, 각종 나물, 생선구이 등을 맛나게 먹고 학교에 갔다.

어릴 때는 원래 그런 행사라고 생각했는데, 커서 돌이켜보니, 외할머니는 대인배였다는 생각이 든다. 동네 할매,할배들이 모두 자신의 생일에 동네지인들을 위해서 아침상을 차리진 않았을 테니까. 할머니는 자신의 생일 전날부터 바쁘셨겠지. 아궁이에 가장 큰 솥을 올리고 20~30명이 먹을 미역국을 정성스레 끓여 놓고 각종 반찬을 준비하셨을 테지. 아침엔, 밤새 불린 팥으로 따뜻하고 고소한 팥밥도 짓고,, 생일에 받을 선물보다 자신의 생일에 다른 이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에 분주하고 기쁘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긴다.

이 선한 마음의 할머니는 내가 대학다닐 때쯤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 년 후, 꿈에서 만났다. 나무가 우거진 넓고 큰 숲 속길 올라갔더니 아주아주 넓은 마당이 있는 큰 한옥집이 보였는데, 그 집을 들어가니 외할머니가 그 마당에서 따뜻한 미소를 짓으며 포근히 나를 안아주셨다. 할머니는 천국에 가셨다는 확신을 하면서 잠에서 깼다.

나의 선한 외할머니,  천국에 가셔서 편안히 잘 계시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선한 외할머니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