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지라는 이름은,,,
어릴 때 살던 동네 아줌마들은 나를 꼭지라고 불렀다. 아빠가 지어준 이쁜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도 내가 지나가면 꼭지야~라고 부르고 우리 엄마를 꼭지엄마라고 불렀다. 정말 싫었다. 수도꼭지인가? 뭐지?? 그 시절엔 그 뜻이 뭔지 몰랐는데 크면서 저절로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은 딸만 셋이다. 나는 그중 막내. 꼭짓점처럼 딸내미들의 끄트머리가 되어서 나 다음으로 태어날 아이는 반드시 아들이길 바라는 동네주민들의 오지랖이 만든 이름이었다. 정작 우리 부모님은 넷째를 낳을 생각은 1도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 이름의 최대 피해자는 막내딸인 나다. 아줌마들이 꼭지라고 부르면 소심하게 작게 대답을 하거나 눈으로 답하는 버릇없음을 시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반아이들이 내가 꼭지라는 것을 알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이름으로 놀림을 당하는 일은 생존이 걸린 최악의 것이었으므로.
그보다 더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우리 외할머니와 친척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나이 든 여자들로부터 내가 고추하나만 달고 나왔어야 했다는 얼토당토 안 한 아쉬움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내 자존감을 갉아먹는 그들의 아쉬움은 정말 듣기 싫은 말이었다. 그 자리에 나는 없고 정체불명의 고추 달린 사내아이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억울함,, 초등고학년이 되면서 그런 말들은 듣지 않게 되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은 주변인들의 오지랖은 아들이 아니어서 죄송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정작 우리 아빠는 “아들 필요없다 딸이 최고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닐 거라는 의심도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내 머릿속에는 딸 셋은 창피한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학교에 가서도 “그 언니, 저 언니가 우리 언니들이야” 라며 형제관계를 굳이 밝히지 않았고, 다행히도 우린 너무나 닮지 않아서 아무도 우리들을 연결시키지 않았다. 가족관계를 조사하던 학교 선생님들에게 어쩔 수 없이 딸 셋이라고 말하면 그다음 질문은 뻔했다. "남자형제는 없어?" "네"라고 답하면 "아이고,," 혹은 "부모님 아쉬우시겠다" 뭐 이 딴말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셨다. "아뇨! 우리 부모님은 딸이 최고라고 하시던데요!"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답답하고 아쉽다. 이제 와서.
친척집에 가거나, 외식을 하러 나갈 때는 택시를 타곤 했는데, 다섯 명은 택시에 전부 탈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치는 기사님들도 있었다. 그냥 다섯이라서 안 되는 건데, 그 순간에도 딸만 셋이라서 창피한 건 왜였을까. 식당에서도 부모님과 딸 셋이 한 테이블에 있는 것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사람들이 보는 것 같아서.
아들이 뭐라고 다들 난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주변인들에게 세뇌되어서 쭈그러지는 나도 싫었다. 아들에 대한 반감과 동경, 두 마음이 공존하며 10대를 그렇게 보냈다. 20대가 되어서는 남성이라는 성별에 익숙하지 않아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격동의 연애를 했고 10년 연애끝에 결혼을 했다. 대학생시절 작은 언니는 여성운동가 같았다. 지금의 페미, 남혐의 표본이었다. 남자를 싫어하던 언니는 형부를 만나자 콩깍지가 씌여서 후다닥 시집을 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23년 지금, 딸의 위상은 엄청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세 자매는 우리 본가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그에 반해 사위들은 자신의 본가에 무슨 일이 생겨도 와이프들 눈치 보며 승인을 기다릴 뿐이다. 요즘은 아들 낳은 죄인이라고 한다나.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옛날 동네 아줌마들이 위로한답시고 했던 <딸은 엄마아빠 비행기 태워준다니까 더 좋은 거야>라는 말은 현실이 되었고 요즘 젊은 부모들은 딸바보가 되고 싶어 한다니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설움받고 자랐지만 자존감 잃지 않고 끊임없이 애증의 효도를 해 왔던 우리 세대의 따님들 덕분에, 이렇게 시대가 변한 것 같아서 그녀들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