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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After Dark Tour를 마치며

고비의 연속을 넘고 넘어

by 보라

준비하며

빨간색은 사람을 흥분시킨다. 빨간색 배경에서 역동적으로 뛰는 검은 여성의 실루엣은 달리기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 달에 100km 달리기. 이 목표를 채우려고 달리고 달렸다. 고등학생 때 분노를 풀려고 시작했던 러닝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다. 러닝이 너무 깊이 침투해서 장마철에는 기운이 안 날 지경이었다. 러닝을 못 뛰기 때문이다. 물론 트레이드밀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대안은 언제나 원안만 못하다. 이걸 알기에 비나 눈이 오지 않으면 춥든 덥든 무조건 러닝화를 신고 나갔다.


진짜 잘 뛰나? 고백하자면 내 핸드폰과 워치는 나를 과대평가한다. 같은 시간 대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측정한다. 같이 뛴 러닝 메이트와 기록이 매번 현격히 달랐고, 예상할 수 있듯이 내가 월등히 빠르게 기록되었다. 그가 못 뛰고, 내가 잘 뛰는 게 아니라 어쩌면 이 기록이 내 인지를 흐리고 있다면?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기록칩을 달고,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달렸을 때 나는 어떨까?



나를 알고 싶어! 이 메시지가 나이키에 닿은 걸까. 나이키 애프터 다크 투어에 당첨되었다. 대회 당일 진행자의 말에 따르면, 전 세계 어느 도시보다 서울의 경쟁률이 높았다고 한다. 어마무시한 경쟁률을 뚫고 된 만큼 잘 뛰고 싶었다. 아니, 잘 뛰어내고야 만다. 그 준비를 차근히 해내갔다.




일단 많이 뛰자. 해가 뜨면 러닝화를 신고 광교 호수공원, 집 근처 공원과 산책로를 마구 뛰었다. 대회도 나가보자. 더 서울 레이스 21k(10km)과 빵빵런(5km)을 뛰었다. 최상의 컨디션에서 기록을 위해 달리지는 않았지만, 대회를 나가보는 경험 그 자체가 익숙해지면 조금 덜 긴장할 테니까 미리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달렸다. 달리기 페이스 조절도 놓칠 수 없지. 그간 열리는 호카 러닝 세션과 나이키 애프터 다크 투어 트레이닝 세션을 나갔다. 추워도 어두워도 다 함께 발을 맞춰 앞으로 나아가는 패턴을 익혔다. 비가 온다? 그렇다면 트레이드밀로 가자. 속도 11-12으로 달리면 내 평소 속도보다 더 빠르다. 내 한계 이상으로 잠깐이라도 나를 밀어붙인다. 멈추지 마! 10초만 더!



출발선에서

대회 당일 아침부터 회색빛 하늘은 파래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큰일이다. 한 번도 우중런을 해보지 않았다. 우중런은 노래 없이 달려야 가능하다. 에어팟 끼고 달리기? 방수가 안 되는 에어팟에게 못할 짓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산 나이키 알파플라이는 탄성이 좋아서 발목이 다치기 쉽다. 비 오는데 알파플라이 러닝? 대학원생이 본분인 내 몸에게 못할 짓이다.


감사하게도 대회 장소로 가는 길에 비가 오지 않았다. 너무 햇빛이 내리쬐는 날씨보다는 조금 흐리면 오히려 좋다. 1km 넘게 뛰면 몸에서 열이 오르는데, 날이 조금 흐리고 추우니까 체온이 천천히 오를 것이다. 그럼 사전에 몸풀기를 잘해주면 10km를 쭉 달리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장난인가? 여의도역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여의도 공원엔 우산을 쓴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회 참가 품목이었던 나이키 핑크 모자 위 우산을 보는데 억장이 무너졌다. 진짜 이대로 우중런을 뛰어야 하나. 우산을 쓰고 몸을 풀면서 머리를 굴렸다. 머릿속에서 노래가 울리게 하는 방법이 있을까? 이래서 러닝용 워치와 이어폰이 필요한가? 이래서 자꾸 돈을 쓰게 되나!?



이게 말이 돼? 러닝 시작하기 20분 전쯤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우산 쓰고 뛸지도 모르니 우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흥 나게 페이스를 조절해 주는 노래(에어팟)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비가 그쳐? 잽싸게 물품 보관소로 달려가 우산을 맡겼다. 그때부터는 무신론자의 간절한 기도가 시작됐다. 제발, 대회가 끝난 다음, 아니 최소한 결승선 뚫은 다음에는 비가 퍼부어도 좋으니, 그 지친 몸을 이끌고 비를 다 맞을 테니, 러닝 뛰는 동안만 비를 좀 참아주세요.



2km에서

수많은 응원과 함께 분홍 모자를 쓴 여성들이 뛰기 시작했다. 좁은 길에 여러 사람이 뛰면 속도를 내기 어려웠다. 요리조리 피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자동차 주행처럼 속도를 올려 추월할 사람은 왼쪽으로 달리라는 안내에 조금 빨리 가는 사람들이 왼쪽으로 이동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왼쪽 라인에서 앞으로 앞으로 달렸다.


빠른 비트의 노래에 맞춰 다리가 움직였다. 심박수가 조금씩 오른다. 몸에 열도 따라 올랐다. 으스스하게 느낀 추위는 온데간데없었다. 탄력적으로 발을 튕겨내는 신발 덕분에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수월했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내가 원하는 만큼 달릴 수 있었다.


5km에서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5km를 향해 달리는 중 배 왼쪽에서 조금 윗부분, 갈비뼈 쪽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평소 뛸 때라면 러닝 전 무엇이든 먹었을 때 느껴지는 복통이 있었다. 그런데 이 통증은 그것과 달랐다. 후후! 흡흡! 하며 짧게 두 번 내뱉고 두 번 들이쉬는 호흡으로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반환점으로 가는 코스 중 한강을 가로지는 대교에서 그 고통은 증폭되었다. 탁 트인 차도도, 시원하게 흐르는 한강 물줄기도, 인도에서 북 치고 춤추며 공연하는 팀도, 높디높은 건물에 붙은 붉은 응원 포스터도 눈에 담기지 않았다.


실험을 해보자. 숨을 들이쉴 때 아픈가? 후후! 흡흡!의 주기와 길이를 바꿔보며 고통의 크기 변화를 느껴보려고 했다. 숨을 뱉을 때 아팠다. 그렇다고 숨을 안 뱉을 수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짧게 숨을 뱉되 들이쉴 때는 크게 공기를 넣는다는 생각으로 호흡을 조절했다. 이때쯤 깨달았다. 소화 기관에서 에너지가 필요해서 아픈 배가 아니다. 이건 호흡이 부족하다는 신호다. 이걸 알고 방법을 시도해도 영 소용이 없었다. 호흡 길이(짧게/길게)를, 방법(코/입)을 아무리 바꿔도 아픈 건 그대로였다.


6km를 넘어가는데도 복통이 이어지는데 답답함이 몰려왔다. 아니, 이렇게까지 여러 방법을 쓰는데 안 먹힌다니! 러닝 코스 중간중간에 있는 디제잉 부스에서 아무리 신나는 노래가 나와도 답답한 마음을 날려버리긴 역부족이었다. 몸이 말을 안 들으니 흡족할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방법을 아예 바꾸기로 한 것이다.


최면을 걸자. 정신 승리를 해보자. '안 아프다.' '할 수 있다.' 이 네 글자를 번갈아 가며 반복했다. '해낸다.'를 해보니 세 글자라 그런가 달리는 패턴에 안 맞아서 즉시 버렸다. '안 아프다' '할 수 있다'를 계속 머릿속으로, 통증이 심해지면 입모양으로 읊으며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신기하게도 서서히 아프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전에 썼던 방법이 이제야 효과를 나타내서, 몸이 지독한 주인에게 질려서 등 여러 이유로 통증이 사라진 것일 수 있다. 어쨌든 이제 후반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8km에서

여기서 마무리될 리가. 이번엔 발이 문제였다. 알파플라이를 신고 처음 뛰었을 때 양쪽 발 안쪽, 중앙 부분에 물집이 잡혔다. 탄성이 좋은 만큼, 달리면서 균형을 잡느라 발 중앙에 힘을 많이 줘서 생기는 물집이었다. 두 번째 뛸 때는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이제 신발에 내 발이 길들었다고 판단했다. 그때 간과했던 통증이 또 찾아왔다. 특히 왼쪽 발 안쪽은 디딜 때마다 윽! 짧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꽤 심하게 아팠다.


8km 표지판이 보였다. 9km 표지판이 지나간다. KBS 건물이 보인다. 점점 끝은 다가오는데 도저히 추진력을 낼 수가 없었다. 외다리 귀신처럼 콩콩 뛰어도 속도가 빠르면 그렇게라도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뛰면 오른발도 얼마 못 버티고 포기할지 몰랐다. 그래도 오른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오른발을 디딜 때 탄성을 더 주되 왼발을 디딜 때 가볍게 떼어냈다. 절대 걷지 말자, 여기까지 뛰어냈으니 끝까지 할 수 있다.


엔드 포인트가 보인다. 대문처럼 생긴 출구의 위쪽 바에는 시간이 계속 늘어난다. 검정 배경의 전자시계판 위로 빨간 숫자가 빠르게 지나간다. 그 속도만큼이나 막판 스퍼트로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지나간다. 양옆에 인도에서 사람들이 "파이팅! 얼마 안 남았어요!"라고 소리치며 응원한다. 50m를 남기고 발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50m만 버텨줘. 그리고 참았던 스퍼트를 내기 위해 몸을 살짝 앞으로 굽히고 팔을 크게 저으며 달렸다.



마무리하며

러닝이 끝나자마자 문자가 왔다. "***님의 After Dark Tour Seoul 10k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완주 기록은 00:50:37입니다." 이제 끝났다. 수많은 친구들의 축하(멋지다! 대박!)가 쏟아졌다.




솔직히 나는 아쉬웠다. 50분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반환점 전까지 달리는 페이스였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7천 명 중에 308등이 왠지 마음에 안 든다. 300등 안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됐을 텐데 왜 그 조금을 못 했을까. 금메달보다 은메달이 서럽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건가. 난 은메달 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쉽고 속상할까.


아빠가 물었다. "너는 뛰면서 무슨 생각을 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뛰어?" 이 대회를 신청했을 때의 나는 그렇다고 했을 것 같다. 그러나 호흡을 정신 승리로 다스릴 수 있다, 발에 물집이 생겨도 스퍼트를 내고야 만다는 마음으로 달리고 나니 다른 답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알았다. 이 경험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져 더 나은 내가 될 것이란 걸!


어떻게든 해낸다는 마음으로 뛰어.
끝까지 뛰려면 조절도 필요해서 매번 최선을 다하지는 못해.
그래도 어떤 방법으로라도 끝에 간다는 집념으로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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