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xhill Jun 03. 2024

신데렐라와의 마지막 춤

Last Dance with Cinderella

'댕, 댕, 댕'


종이 세 번 울렸다. 오후 11시까지 15분이 남았음을 알리는 종이었다.


하루 종일 진행되던 파티와 무도회에서는 열기가 많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까지, 파티에서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서서히 치솟아 절정에 이르고 다시 천천히 차분해지는 과정이 수 번 반복되었다. 이제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무렵, 이변이 없는 한 열기와 소란이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점점 조용해지고 한산해지는 무도회의 분위기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계속 작아지면서 새벽 어느 즈음에 끝이 나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도회에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저 멀리 가장자리에 위치한 조촐한 악단은 계속 음악을 연주했으며, 무대 가운데에 놓인 무대에서는 가수 한 명이 노래를 불렀다. 그 어느 쪽도 앞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모여드는 등의 압도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음악은 무도회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좋은 배경 음악이 되어 주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음악이 갑작스레 끝나 버린다면 눈치채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무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역시 귀족과 정치인, 학자 등 사회 고위층들이었다. 그들은 흔치 않게 열리는 거대한 무도회에 모이기 위해 값비싼 치장을 하고 행동거지를 연습했다. 여러 명의 수행원들이 동원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이들이 모인 파티에서는 아무리 분위기가 흥겨워지고 열기가 치솟아도, 그것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울면서 대화와 소란을 이어 가는 것이었지, 날고뛰는 등 육체적으로 격렬함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11시를 넘기는 이 시간에 그들은 자신들의 저택으로 돌아가거나, 아직 남아서 간단한 대화를 즐기거나 파이프를 피우거나 파티 후 남은 식은 음식들을 집어먹고 있었다. 겉모습은 으리으리하지만 이들의 자세한 행동과 태도를 바라본다면 그리 좋은 말을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남들과 다르게 차별화되고 눈에 띄는 인물들도 없지 않았다. 그중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인물은 바로 근처 왕국의 카니스 왕자였다. 큰 키와 날씬하면서도 든든한 체구를 가진 왕자는 제복과도 같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두 눈은 파란 보석과도 같이 빛났으며, 검은 머리카락과 조각 같은 얼굴은 멀리서도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그의 왕자라는 신분을 어렵지 않게 드러나게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왕자는 유리잔 하나를 든 채 무도회장을 걸어 다니며, 새어 나갔지만 아직 남아 있는 분위기를 즐기며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왕자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거나, 이미 오늘 하루만 해도 수도 없이 인사를 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도 길게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무도회나 왕국 사정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귀족 친구들, 원하는 일을 시킬 수 있는 시종들 뿐이었다. 무도회나 파티라면 여김 없이 열리는 지루한 사교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 자랑과 뒷담들이 모두 지나간 이후 왕자에게 더 이상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은 없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하늘 위에 뜬 밝은 보름달 역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왕자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텅 빈 것 같으면서도 이상한 감정이 가시 하나처럼 박혀 있었다.


무도회장 깊은 곳과 가장자리를 누비면서, 왕자는 시종이 내민 접시 위에 있던 작은 케이크 조각을 집어먹었다. 정원의 분수 근처를 돌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귀족 스승을 만나 잠시 인사를 나누고 다시 계속 걸었다. 많은 부분을 누비고 걸었지만 마음의 허한 부분은 과일에 생긴 갈색 부분처럼 남아 없어지지 않았다. 왕자는 터덜터덜 계속 걸었다. 남이 보기에는 뚜벅뚜벅 강인하게 걷는 모습처럼 보일 테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왕자는 포기한 채 자국이 묻은 하얀 셔츠처럼 더럽혀진 기분을 안고 다시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와인을 더 마시고 싶었다.


무도회장에 다시 들어서자 사람들은 더 떠난 상황이었다. 음악을 연주하던 악단도 교체되어 새로운 연주자들은 더 낮고, 부드러우며 분위기에 알맞은 차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맞게 음악을 연주한 것인지, 아니면 새롭게 연주되는 음악에 맞게 분위기가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무도회장에서는 한가함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왕자는 얼마 남지 않은 시종에게 와인을 받은 다음, 그것을 한 모금 들이켰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달빛을 받아 그의 기분은 확실히 나아졌다. 달빛은 태양처럼 뜨겁거나 눈부시지 않았다.


음악이 바뀌니 왕자의 기분 역시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씩 일어서 서로 짝을 짓기 시작했다. 둘씩 모인 사람들은 곧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손을 잡은 채 무도회장을 움직이고 발로 바닥을 쓸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에서는 그 대열에 껴서 춤의 바다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근처에는 모두 짝을 지은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마저 익숙한 얼굴들은 아니었다. 왕자는 춤추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자신의 짝을 계속 찾았다.


왕자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달빛 아래, 왕자에게서 가까운 무도회장의 한가운데서, 여인 한 명이 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멈추어 서 있던 것일 수도, 아니면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을 눈치챈 왕자는 티 내지 않고 천천히 여인을 따라서 바라보았다. 여인은 검은 머리카락에 작고 하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검고 아름다운 눈과 앵두 같은 진홍색 입술이 튀었다. 여인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파티에 참석한 다른 귀족의 것들과 비교하면 볼품없고 값싼 종류의 드레스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조촐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가만히 선 그녀의 모습과 표정에서도 남들과는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왕자는 천천히 여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왕자에게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는 듯했다. 그가 걸어가는 동안 여인은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있었다. 왕자는 여인에게 가까워지자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러자 여인은 왕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볼은 불은 지핀 듯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으며, 가까이서 보자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쾌함이나 무서움의 감정이 아니었다. 스펙트럼의 반대쪽에 있는,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강렬한 감정이었다.


무도회의 한가운데서 서로를 마주 보는 두 남녀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춤을 추며 지나갔다. 부드러운 음악은 달콤하고 따뜻한 풍경이 되어 두 사람 그리고 무도회장 전체를 쓰다듬고 따뜻한 물처럼 채웠다. 왕자와 여인은 말없이, 거의 동시에 서로 손을 내밀었다. 깍지를 낀 채 맞잡은 손을 바라보던 둘은, 얼마 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춤의 대열에 합류했다.


몇 시간 전 무도회와 파티를 가득 채우던 화려한 춤은 아니었다. 이번 무도회의 마지막을 장식할 춤은 다른 춤과 달리 두 사람이 함께한 채 무도회장 그리고 파티장 전체를 천천히 걸어 다니고 누비는 모습이었다. 격식이나 규칙, 분위기에 맞출 필요도 없었다. 그것들은 태양이 저뭄과 동시에 지평선 너머로 함께 사라진 뒤였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왕자와 여인은 무도회장을 가로질러, 무대 아래로 내려가 풀잎을 밟으며 정원을 따라 걸었다. 정원에는 주황색과 보라색, 분홍색 등 아름다운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으며, 밤의 어둠과 달의 환한 얼굴 아래 낮에는 볼 수 없는 우아하면서도 조신한 모습을 보였다.


"꽃들이 아주 예쁘죠?" 왕자는 침묵을 깬 채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과는 다르게 여인은 두 눈으로 왕자의 얼굴 그리고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자 역시 여인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여인의 검은 눈동자 안으로 하늘의 달과 은하수가 비쳐 보였다. 그것은 여인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그녀의 영혼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눈이었다. 여인의 표정은 왕자의 모습에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여인을 바라보며 왕자는 뒤이어 말을 이어 나갔다.


"루미스 왕국의 카니스 왕자예요.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왕자는 말했다.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인의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왕자의 대답에 여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수줍음을 타는 것 같기도 했다.


"제, 제 이름은."


"제 이름은 민디예요." 왕자는 그것이 진짜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인은 말을 더듬으며 이름을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무도회는 처음이라, "


"이 근처에서 온 것이 아니거든요."


여인의 목소리는 음악만큼이나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녀가 말을 할 때면 음악과 그녀의 목소리가 뒤섞여 구분이 가지 않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음악이 연주되는 무도회장에서 멀리 떨어진 정원까지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왕자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이 생각을 여인에게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당신의 목소리가 좋군요." 왕자는 짧게 말했다. 자신의 깊은 마음을 완전히 전달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뒤늦게 파도처럼 몰려왔다. 자신이 실수를 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곧 마음을 접고 다시 말없이 손을 잡고 정원을 누볐다.


그때 왕자는 여인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여인에 처음 가깝게 다가갔을 때 보았던 목걸이었지만, 여인의 얼굴과 표정, 목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잠시 동안 잊고 있었다. 왕자는 목걸이를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갈색 줄로 여인의 목걸이 끝에 걸린 보석은 하늘색이었다. 정확히는 푸른색과 하늘색 사이의 색이었다. 하지만 하늘색에 더 가까운 밝은 계열의 색임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슨 보석인지 왕자는 알지 못했다. 다이아몬드 같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목걸이가 아름답네요." 왕자가 여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인에게서는 희미하지만 태도의 변화가 조금 나타났다. 목걸이에 대해 묻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왕자는 자신이 목걸이와 보석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꼈다.


"제게 굉장히 소중한, 중요한 거예요." 하지만 예상을 깨고 여인은 목걸이에 대한 대답을 했다. 여인은 손을 목걸이로 가져가 끝에 달린 보석을 어루만졌다. 보석은 그녀의 가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드레스의 포근한 천과 옷주름 사이에 놓인 그것은 아름다웠다. 여인은 보석을 쥐고 위로 들어 올려, 그것을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달빛을 받자 보석은 반투명한 자태를 뽐내며 빛을 내뿜었다. 왕자는 지금껏 보지 못한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반대로 여인은 이미 많이 본 광경인 듯, 놀라거나 경탄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다시 보석을 손에 쥐었다.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그녀의 손으로 가려졌으며, 잠시 동안은 그녀의 꼭 쥔 손가락 사이로 빛을 희미하게 내보냈지만, 달빛으로부터 차단되자 다시 빛을 멈추었다. 여인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왕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도 보였다. 그러고 나서 여인은 입을 열었다.


"저는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왕자는 그 말을 듣고 여인을 다시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감정은 진실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자님은 저를 모르고, 또 제 이야기를 전혀 모르시겠죠. 굳이 알려고 하시거나 알지 않아도 돼요. 사실, 알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왕자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은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가 하는 말,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 그리고 이 순간 주위의 분위기와 공기와 기류까지.


"하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말을 하는 동안 여인의 감정은 점점 격양되어 갔다.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식의 격양은 아니었지만, 말을 하며 그녀의 목소리에는 점점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음을 왕자는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잊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여인은 말끝을 흐렸으며, 작은 눈물 한 방울이 여인의 볼을 타고 눈에서 흘러내렸다. 왕자는 그런 여인을 보채거나 무슨 일인지 깨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오히려 여인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며,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녀를 달래고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왕자는 손을 내밀어 여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여인은 그런 왕자를 막지 않았고, 왕자는 여인의 들썩이는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왕자는 여인을 두 팔로 안아 주었다. 왕자의 품속에서 여인은 흐느낌을 멈추었다.


왕자와 여인이 서로를 껴안고 둘의 마음이 맞닿았다. 여인의 복잡한 마음이 왕자에게 전해졌다. 그녀의 이야기를 몰랐지만 왕자는 그녀의 마음을 느꼈다.


'댕, 댕, 댕'


그 순간, 종이 세 번 울렸다. 여인은 종소리에 놀란 듯, 왕자의 품에서 몸을 휙 돌려 무도회장을 바라보았다.


"15분만 있으면 자정이네요." 왕자가 말했다. 왕자는 그리고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여인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혹은 그에 가까운 감정이 나타나 있었다.


여인은 왕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저는 이제 가야 해요."


왕자는 갑작스럽게 떠난다는 말에 당황스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인은 왕자에게 다시 한번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여인은 드레스를 두 손으로 든 채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여인을 뒤따라가지 않고, 왕자는 그 자리에 서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여인의 모습이 수풀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왕자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들어 올린 드레스 아래로 나타난 여인의 유리 구두였다. 빛나는 유리 구두의 모습은 달빛이 비치는 정원 한가운데, 왕자의 마음 한가운데 다시 나타나는 듯했다.


수풀을 가로질러, 여인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계속 달리는 그녀는 방금 전까지 왕자와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느꼈던 감정들을 소화할 새도 없이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했다. 그녀는 달리기에 방해가 되자 두 구두를 벗어던졌다. 숲 한가운데 버려진 유리 구두를 뒤로 하고, 여인은 계속해서 어디론가 달려갔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온 달빛을 받은 유리 구두는 숲 한가운데서 빛나고 있었다.


여인이 나뭇잎과 가지를 헤치고 달려온 곳은 숲 어딘가에 있는 작은 호수였다. 나무가 없고 숲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이곳에서 고개를 들면 밤하늘과 달, 구름 등이 깨끗하게 보였다. 여인은 자신의 드레스 위에 목걸이 그리고 보석이 아직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목걸이를 낚아채듯 잡아당겨, 손에 보석을 쥐었다. 그리고 나서 엄지와 검지로 보석을 쥔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보석은 아직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늘색 빛을 뿜어냈다.


여인은 고개를 돌려 호수에 자신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풀벌레 소리를 제외하면 호수 근처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요란하게 해치며 달려온 길 뒤쪽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숲에는 바람마저 불어오지 않았으며, 완벽한 밤의 고요에 잠겨 있었다. 물결이 치지 않는 거울 같은 호수 위에는 달이 비쳐 있었다. 여인은 손에 보석을 든 채 호수로 걸어갔다.


그녀는 호수의 가장자리에 있는 물과 흙의 경계에서 멈추지 않고,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발이 흙에 더러워지고 드레스가 물에 젖어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물은 그녀의 허리까지 차올랐으며, 여인은 발을 떼고 물 위로 드러누었다. 누움과 동시에 발길을 하면서, 그녀의 몸은 천천히 호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유리 위를 미끄러지듯 그녀의 몸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호수의 중심, 달빛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곳에는 달이 비쳐 있었다. 여인의 몸은 호수에 비친 달의 모습 위로 움직였다. 달의 모습을 가린 그녀는 쥐고 있던 손을 피었으며, 보석은 호수 물과 맞닿게 되었다. 그 순간 보석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달빛과 만나 내뿜던 하늘색 빛이 아닌,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이었다. 보석에서 나온 하얀 빛은 곧 그녀의 손과 팔을 타고 올라가, 그녀의 몸 전체를 하얗고 밝게 물들였다.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수에는 다시 달빛을 제외하면 어둠에 물들었으며, 물결이 잦아들고 깨끗해진 호수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수면에는 고요함만이 묻어 있었다.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호수와 숲을 메웠다.




신디는 물이 가득 잠긴 욕조에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몸을 일으킨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에 달린 전구가 노란색 욕실을 비추고 있었다. 세면대 위에는 낡은 전자시계가 놓여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보석이 쥐어져 있었다.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자 보석은 더 이상 빛을 내지 않았다. 그녀는 성공했다. 한 시간 뿐이었지만 말이다. 잠시 욕조에 앉아 있던 신디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왕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것보다 더 슬프고 격렬한 울음이었다. 이곳에서는 눈치를 보거나 맞추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신디는 욕조에 앉은 채, 욕조를 가득 채운 물 위로 자신의 눈물을 떨어트렸다. 두 물이 만나자 작은 물결 여럿이 욕조 위에 나타났다.


닫힌 욕실의 문 밖으로 신디의 울음소리는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한밤중의 그녀의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욕실이었다. 욕실 옆에 위치한 그녀의 방에는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밖의 구름 사이로 달이 모습을 드러내 달빛을 내리쬐었으며, 그녀의 방은 밝게 빛났다. 신디의 침대 머리맡에는 그녀가 죽은 남편과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의 신디는, 카니스 왕자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위밍 풀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