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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30. 2023

맏이 29. 패잔병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 1950. 10.

     


연대장은 임부택 중령이었다. 연대장은 침통한 목소리로,

“전 장교는 잘 들어라. 우리는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곳에 왔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정보에 의하면 우리 국군은 전 전선에서 승리를 거듭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고 특히 우리 연대는 제일 먼저 압록강에 도달했다. 각 전선에서도 모두 한만 국경선에 도달 직전이고 우리는 이제 남북이 통일되는 영광을 갖게 된 이 시점에서 뜻밖에도 은밀히 중공군이 이 땅에 침투하여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비통한 현실에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각 부대는 속히 인원 장비를 확인하고 오후 6시에 출발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이어 ‘각 장병은 실탄은 충분히 가져라. 실탄은 노랑 낙하산, 차량의 연료는 빨강 낙하산, 파란 낙하산은 식량이니 그것으로 보급받고 각자는 질서를 지키고 책임자의 지시에 따르라.’는 요지의 지시였다. 우리는 아연실색했다. 급히 숙소로 돌아와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후퇴라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중공군의 침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초산까지 도달했을 때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 은밀히 소로를 통하여 온정리를 탈환하고 7연대의 후면을 차단할 준비가 되어있던 것을. 우리는 왜 미처 그것을 몰랐을까. 후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 국군이 38선을 넘을 때 유엔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이미 여러 정보에서 판단했음인지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나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정치적 반대로 적을 보고서도 폭격을 못 했고 수풍댐의 폭격도 하지 못한 채 결국 맥아더 장군은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참으로 천추의 한이 되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만약 만주 폭격만 했어도 오늘의 세계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잘하면 고구려의 옛 땅도 찾을 계기가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이미 어두워진 길을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고 진격할 때와는 달리 너무 비참한 후퇴였다. 이동은 지지부진하였다. 그 많은 차량이 일시에 한 길로 빠져나가자니 무리였다. 얼마나 왔을까 침묵의 후퇴는 계속되어 온정리와 고장 사이에 흐르는 계곡 길로 들어섰다. 그 많은 차량들이 간격도 없이 바싹 붙어 한때는 꼼짝 못 할 그런 무질서한 이동이었다. 선두 차가 계곡 상류에 다다를 무렵 선두차 부근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박격포 소리인 것 같았다. 우리 후발대의 위치에서 약 500m 전방이다. 선두에서 전달하는 말에 의하면 온정리에 이미 중공군이 들어와 완전포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7연대가 좁은 계곡에 모두 들어왔을 때의 공격이니 주머니 속의 쥐가 된 꼴이다. 몇 발의 포사격을 신호로 우리 대열에 적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고 기관총 소리, 소총 소리, 포 소리가 요란하다. 차에서 불이 나고 그 수는 순식간에 늘어나 우리 국군의 당황하는 모습은 아비규환의 바로 그것이었다. 조명탄 빛은 낮과 같이 환하게 좁은 골짜기를 밝혔다. 적은 강 건너에 포진하여 절벽 밑 도로상의 우리 차량 대열에 퍼 부니 이런 참상이 있겠는가.

이때 연대장과 미 고문관이 도로 북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기겁을 하고 차에서 뛰어내려 길옆에 엎드렸다. 얼마 후 중공군의 나팔 소리가 연달아 강 건너 이곳저곳에서 났다. 사격이 중지됐다.

우리는 지리멸렬 상태가 되었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뒷산 계곡으로 숨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총 한 방 대항도 하지 못한 채 그길로 우리는 패잔병 신세가 되어 결국 이런 모양으로 7연대는 흩어지고 말았다. 10월 25일인가, 26일인가?

그런 일이 있은 후 수없이 능선을 넘고 넘어 안전지대로 빠져나왔다. 이제는 한 개 집단에 지나지 않았고 지휘관도 있는지 없는지 그저 한 집단이 일렬로 산으로 산으로 남쪽을 향해 갈 뿐이다.

얼마나 빠른 걸음인지 밤길을 걷다 보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길이 없는 산 위를 제각기 가다 보니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집단은 자꾸만 흩어져갔다. 배도 고팠다. 식량은 하나도 없다. 밤낮으로 걷는 것이다. 산으로만 걸으니 식량이란 구할 도리조차 없었다. 힘없이 힘없이 따라만 간다. 떨어지면 큰일이 아닌가 하고. 이 강행군에서 견디다 못한 보병의 부상한 장교는 중간에서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7연대는 산산이 흩어지고 어느 지점에 왔을 때는 연대 병력이 100여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어디까지 왔을까? 진격할 때 희천에서 온 시간을 감안해 보았으나 포위망을 벗어나기에는 아직 요원한 거리였고 동서남북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신도 피로했다. 배도 고파 혹 산간을 지날 때 배추 포기라도 있으면 서로 쟁탈전을 벌였다. 초산군과 희천군은 높은 산으로 경계되고 우리는 그 산 위쯤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산을 타고 가면 희천으로 가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우리 국군 진지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사병은 말했다. 이곳에서 얼마 안 되는 곳에 묘향산이 있고 자기 고향도 그 부근에 있는데 한 번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는 데까지 그 부근 지리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모르지만 너무 높은 산으로 가면 안 되니 낮은 산, 산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의 말을 따라 우리는 계속 남하했다. 들을 건너 또 산으로 그런 도피 아닌 행군을 이어갔다. 이곳이 자기 고향이라고 한 그 사병은 어느새 없어졌다. 아마 고향으로 갈 의도로 중간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한참 오다 보니 비교적 넓은 들에 다다랐다. 이곳에는 사방에서 모여든 연대 병력이 합쳐 약 200명 정도가 되었고 연대 참모급 장교와 어떤 미군 장교도 있었다. 부락은 없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휴식을 취했다. 오는 도중에 지쳐서 낙오하고 말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가져 본 나였지만 역시 잘 따라왔다고 생각했다. 모두 쉬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때다. 바로 상공에 미군의 쌍둥이 비행기가 두 대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손을 흔들어댔다. 비행기는 저공으로 우리가 있는 중심에 낙하산을 투하했다. 초산 고장에서 본 그 낙하산이다. 노랑과 파란색이다. 실탄과 식량의 보급이다. 사병들이 뛰어가고 얼마 있어 그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대부분 식량이었는데 뜯어보니 미군 C레이숀이 한 상자에 4개씩 들어있다. 4일분이다. 우리는 각자 가질 수 있는 데까지 가지라고 했다. 보급품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즉각 C레이숀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소고기, 돼지고기, 콩, 소시지 깡들, 과자, 담배, 껌 등 미군들의 비상식량이 우리를 환장하게 했다. 나는 큰 상자 두 개를 가졌다. 장교 체면에 두 개는 꼴볼견이 아닌가 했으나 그래도 양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나는 그것을 어깨에 맬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모두를 둘러보았다. 역시 두 개씩 맬 준비를 하고 있어 내심 웃음이 나왔다.

한참 후에 또 한 대의 헬리콥터가 날아와 밭에 내려앉았다. 이미 기다렸다는 양 미군 세 사람이 뛰어가더니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헬리콥터는 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쁜 놈들! 우리 부연대장도 같이 태워갈 것이지.” 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연대장은 예상대로 없었다. 우리가 계곡에서 포위당할 때 고문관과 같이 북으로 되돌아간 후 실종된 것이다. 그 후 부연대장이 지휘를 맡아 이곳까지 온 것이고 부연대장은 지휘용 무전기로 7연대의 상황을 아군에게 타전한 것이 결국 미군의 구출과 우리의 보급으로 이 상황은 끝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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