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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Oct 02. 2023

아군을 찾아서

패잔병으로

강을 건넌 나는 이곳에 국군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미 수일 전에 철수한 것을 알았다. 실망이 깊었으나 별도리가 없어 남하를 계속하였다. 일행은 불과 다섯 명이었다. 강을 건너와서 다른 길로 간 국군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강을 건너와 보니 이곳 일대는 산간지대이고 작전 지역에 들지 않음으로 부락마다 주민들도 있었다. 다행히 적개심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남북통일이 다시 요원해졌다며 자주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위험 없는 탈출을 할 수 있었다. 때로는 주민의 손으로 지은 강냉이밥을 얻어먹으며 오랜만에 레이숀에 길들인 뱃속을 우리 양식으로 채웠다.

패잔병이 되어버린 우리는 조직적인 군대가 아니고 유격대와 같은 존재여서 하루속히 원대를 찾아가는 것이 지금의 당면과제이고 보면 더 참고 빨리 국군이 있는 곳까지 가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또 산으로 올라갔다.

강을 건넌 한참 후부터는 산길은 되도록 피하고 묘향산을 저 멀리 좌측으로 보면서 개천(价川) 방향으로 걸었다.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이동하면서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해보니 중공군은 아직 못 보았다고 한다. 우리는 용기를 냈다. 얼마 안 가면 국군을 만날 수 있다고.

얼마나 왔을까? 한참 큰길로 오는데 어떤 민가에서 한 노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안심을 시키고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 노인은 소민동이라고 하면서 유명한 동굴이 있다고도 한다. 아군의 이동 상황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어젯밤까지 국군이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모두 이동해 갔다고 한다. 그리고 중공군이란 말에 의아해하게 생각한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이다.

나는 내심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국군과 중공군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어느 길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 지도도 없어 머릿속에 기억한 지도를 상기하니 덕천(德川)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곳에서 바로 남하하면 개천(价川)이 나오는데 가깝기는 하지만 그후 용문산을 넘자니 이곳은 서부 전선에 해당되어 주로 미군이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 진격시 후퇴하는 인민군을 차단하기 위해 미군이 낙하산 부대를 투하한 곳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코스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군이 우리를 오인하고 한 방 쏘면 끝이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 비교적 넓은 신작로를 걷기 시작했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하면서 계속 걸었다. 이 길은 남북이 아닌 동서로 뻗은 길이었다. 신작로 도로상에 가재도구 등이 흩어져 있어 한때의 혼란을 상상했다. 어떤 고갯마루에 이르니 젊은 여자가 비행기의 총에 맞은 듯 쓰러져 있었다. 비행기의 위력을 모르고 길을 걷다가 불의의 총격을 맞아 죽은 것이다. 한 인생이 어이없게 죽어갔다. 수많은 인명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한 것이 아닌가! 전쟁이 도대체 무엇인가? 불쌍한 여인아…….

얼마나 걸었을까.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이렇게 걷다 중공군이 기습하면 모두 몰살이다.” 하고 쓸데없는 농담도 하며 무인지경의 길을 걸었다. 날씨는 좋았다. 약 백 리는 왔을까. 동네 앞을 지나는데 중년쯤 되는 한 농부를 만났다. 우리는 경계하면서 물었다. “국군인데 덕천으로 가려고 합니다. 거리가 얼마나 되며 지금도 국군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는 친절하게 답을 한다. 덕천은 오늘 중공군이 들어왔고 국군은 어젯밤에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니 국군이 있는 곳을 가려면 저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가면 된다고 한다. 그 길은 소로이지만 길은 좋다고. 그곳은 북창(北倉)이고 산길로 가면 어쩌면 국군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기왕에 이렇게 됐으니 좀 쉬었다가 가자고 했다. 배가 고팠던 것이다.

농부에게 사정을 하니 쾌히 응해 주었다. 예의 강냉이밥이다. 맛이 있었다. 배불리 먹고 마당에 있는 큰 독이 궁금하여 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꿀이란다. 양봉꿀이 이렇게 많을 수가. 꿀의 효험을 잘 아는 터라 주인에게 조금 달라고 부탁했더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한다. 우리는 한 사발씩 그릇에 담고 그 집을 떠났다. 해는 저물고 있다.

배불리 먹고 꿀도 있고 우리가 가는 길 앞에는 적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무작정 걸었다. 고개도 여러 번 넘었다. 쉬며 가며 묵묵히 말도 없이 우리는 수십 리를 온 것 같다. 계곡의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물을 한 모금 꿀을 타서 먹으니 속이 시원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앞에 불빛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그 자리에 엎드려 살펴보았다.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인다. 뭔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린다. 어조가 국군의 그것이다. 더 가만히 살펴보니 확실한 국군이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곳으로 갔다. 19연대 OP의 사병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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