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별 밴드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작년 겨울밤의 추억이 어느 새벽의 얕은 실안개처럼, 혹은 실없는 말보로 담배 연기처럼 아련히 피어오른다. 스쿠터를 타고 어두운 밤공기가 짙게 눌려있는 어느 이름 모를 무명의 도로를 달리던 추억, 잠깐 멈춰 휴식을 청하던 가로등의 빛은 주홍빛이었다. 국선 도로 양 끝으로 장황히 늘어서 있는 주홍빛의 피사체들은, 내게 있어 모임 별의 전자음과도 같았다.
밤공기는 서늘하고, 주홍빛은 따듯하고, 푸른 양철 스쿠터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을 향해 고단히 달려갈 뿐,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차도 10분 간격으로 띄엄띄엄할 정도로 스산하리만큼 고독했다. 고독한 밤으로의 무한한 여행은 미지와의 조우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설렘을 선연히 전달해 준다.
모임별이 그들의 음악적 세계관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확고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선뜻 마주하면 지레 겁을 집어먹을 그들의 난해한 예술관을 음악 속에 잘 녹였다. 여담이지만 모임별은 음악 밴드라기보다는 예술인들을 위한 공동체에 더 가깝다. 그들에게 있어 음악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장치 중 하나일 뿐,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짧은 콩트 단편집, 시, 혹은 알 수 없는 조형물 등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예술관을 설명하고는 한다.
한국적이다, 라는 칭찬을 별로 좋아하진 않으나 그들의 앨범에서는 왠지 모르게 한국적 자취가 묻어 나온다. 세련된 네오 한국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음침한 골목길의 이미지에 가깝다. 한 번은 여수에 거주 중인 외숙모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 6시쯤 바라보는 새벽과 바닷가의 광경은, 기타노 다케시의 필름처럼 푸르렀다. 지금에야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그들의 음악은 바닷가의 선선한 푸른 공기를 뚫고 담배를 태우며 바라보던 수평선의 너머를 미묘하게 닮았었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의 경계선이 알 수 없게 모호해져 서로 섞여버린 그 기묘한 광경을 닮았었다.
그들의 콘셉트는 실로 모호하다. 많은 슈게이징 밴드들이 또한 차용하고 있는 콘셉트이지만, 모임별의 경우에는 그것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난해한 가사와 알아먹기 힘든 가사, 몽환적인 사운드가 그렇다. 어떨 때는 그 모호성 속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 모호성 자체가 가져다주는 어떤 야릇한, 미혹과도 같은 매력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내가 태우던 담배 그 자체를 닮기도 했다. 2000년대 홍대씬의 향수를 회상하며, 이미 다 태워버린 담뱃재를 바라보는 것 같은 행위 말이다. 알싸한 잔향만이 남아있을 뿐, 공허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월간 뱀파이어에 수록된 그들의 열정과도 같은 곡들을 엄선한, 그들의 행적의 결정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베스트 앨범을 향유하며 내가 느낀 것은, 내가 여타 다른 컴필레이션 앨범에서도 느낀 감정이지만, 역시 슬프다.
내가 본 작을 들으며 회상한 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당시의, 민담 혹은 영웅담처럼 그저 막연하게 동경해왔던 2000년대 인디씬이었다면, 본작의 화자가 공통적으로 회상하는 것은 그녀이다. 화자는 서툴고 어리숙한 추억이 담긴 그녀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모호하게 드러나기에, 우리는 전모를 그저 막연히 추측해 볼 수밖에 없고, 인간이란 모름지기 한 물체의 단편만 주어졌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추측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신의 개인적인 서사를 본작에 투여하고, 그리하여 또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개별적인 이야기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늘한 전자음의 쇠사슬로 얽힌 이야기 모음집은 결국 이렇다 할 끝을 내리지 못한 채 마무리된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들은 와인이 한 방울 정도 섞인 씁쓸하고 몽롱한 과거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 또 다른 수평선 너머로 나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