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새 잉크펜을 빨리 쓰고 싶어서, 빨리 닳게 하고 싶어서 일기를 쓰고 책에 줄을 긋는다. 아쉬움이다.
곧 떠나보낼 2025년에 대한 아쉬움. 열심히 닳지 못한 나날에 대한 아쉬움. 뭐라도 한 줄 흔적을 남기는 게 위안이 된다. 닳아가는 잉크만큼의 안도감이다.
잉크가 미처 굳기 전 손끝이 종이를 스치면 금세 펜이 번지고 내 손도 더러워진다. '테무산이라 그런가?' 나의 2025년도 대부분의 날도 이와 비슷하다. 채 마르기도 전에 건드려 번지고 뭉개진, 종이도 더러워지고 손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불편함. 바르고 정교하지 못한 슬픔, 번진 글씨 같은 미련이다. 새로운 도전 투성이었던 2025 한 해는 내게 그렇다.
회사생활을 해보고, 거기서 스트레스도 받아보고, 새로운 연인들을 만나고, 실패도 하고, 생각도 못한 경험들을 해보고, 꿈도 가져봤다. 글이 짧은 것 같은데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볼까? 작은 회사에서 무려 '정규직 전환형' 1년짜리 인턴 생활중이고,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는 정말 스트레스 그 자체이고, 연초부터 꽤 괜찮은 사람들과 소개팅을 했지만 여전히 솔로라이프를 즐기고 있고, 운동을 통해 만난 인연들을 통해 유명 연예인 콘서트도 가보고, 파티도 가보는 등 신바람 나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좋은 어른들을 만나 글을 쓰고, 책을 쓰고, 강연을 해야겠다는 꿈이 생겼다. 모두 다 28년 인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당연하지, 28살이 처음이니까. 이 글도 처음 써보는 태반에 감싸진 글이다...이 문장 멋지다. 갑자기 멋있어졌다. 글자 몇 줄에 빈틈 가득했던 나의 2025년에 갓 태어난 아이 같은 완벽함이란 의미가 부여됐다. 태반에 감싸진 갓 태어난 글이라니. 나의 한 해, 정확히는 351일에도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 순간이다.
우울증과 조울증, 연이은 썸붕(?)과 쥐꼬리만 한 월급 같은 내 한 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로 환골탈태했다. 지금부터는 종이 위 번진 잉크 자국이 아름다운 흔적이 되어 굳으리라. 닳아 없애기에 급급했던 잉크가 삶을 품은 어미의 숭고한 희생이 되리라. 기적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짧은 순간에 기적을 행하고야 말았다. 삶은 기적, 불에 삶아진 게 아니라 글로, 내가 직접 하나하나 박아 넣은 기적. 연말이라는 두 글자로 나를 한껏 짓누르던 후회의 무게가 단숨에 깃털이 됐다. 나는 들뜬 기분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
연말이다. 2025년이 14일 남았다. 잉크는 여전히 가득이다. 어떤 기적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까? 명상을 하면서, 또 다른 글을 끄적이면서 이 고민을 마무리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