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기쁨 Oct 20. 2024

엄마와 실버차


노인 보행보조차는 쉬운 말로 "어르신 유모차", 또는 "실버차"라고 부른다.

우리 아이들이 걸음마를 겨우 떼던 20여 년 전, 집 앞을 지나가시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낡은 유아용 유모차에 텃밭에서 딴 채소들을 실어 천천히 밀고 가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이 무척 신박해 보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어르신들께도 저런 종류의 보조차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어르신들께 알맞도록 개량된 유모차가 등장했다.

다리에 힘이 부족하고 물건을 사서 집으로 들고 가는 것이 힘겨운 어르신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수단이라 길을 가다 보면 보행보조차를 밀고 가는 어르신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사실 비교적 젊은 나에게는 그렇게 보조차에 의지하여 걸음을 옮기시는 어르신들이 측은하게 보였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길거리의 어르신들을 측은하게 보도록 만든 그 보행보조차, 일명 "실버차 "를 몇 년 전부터 친정 엄마가 이용하시게 되었다. 처음 실버차가 친정집에 등장했을 때, 엄마께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속상했다. 이제 연세도 많이 드셨고, 몇십 년 전 다친 다리 때문에 갈수록 걷는 것이 힘겨워지시는 엄마를 위해선 오히려 더욱 요긴한 것이긴 한데... 그래도 아직 깔끔하고 정갈하신 우리 엄마, 외출할 때 의상 색상까지 센스 있게 맞추어 입으시는 우리 엄마가 실버차를 밀고 거리를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니... 다른 할머니들을 바라볼  때 느낀 그 측은함을 엄마에게서 느끼게 되어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이신 엄마는 처음엔 좀 주저하시는 듯했지만 곧 실버차의 쓸모를 아주 만족해하셨고 지금까지 걸어서 병원을 가거나 집 근처 마트를 가실 때마다 잘 사용하고 계셔서 다행이며 그 덕분에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나도 실버차를 밀고 가시는 엄마의 뒷모습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친정에 가면 한 번씩 근처의 마트에 장을 보러 엄마와 함께 외출을 할 때가 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예쁜 모자까지 쓰신 엄마는 어김없이 실버차를 밀고 걸으신다. 다행히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와 마트까지 가는 길은 큰 난이도가 없는 평평한 길이다. 중간에 얕은 계단이나 오르막이 있어 길을 둘러가시는 불편함이 있기도 하지만 엄마는 운동 삼아 걷는다 하시며 씩씩하게 실버차를 밀고 가신다. 그리고 어떨 때는 실버차의 좋은 점을 설명하시기도 한다. 브레이크가 있어서 경사진 길에서도 안전하다, 걷다가 힘들면 의자처럼 앉아서 쉬어도 된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장을 본 물건들을 의자 시트 아래 캐리어에 담아서 밀고 오면 되니까 팔 아플 일도 없다.. 등등, 그래서 엄마는 마트에서 장 본 것들을 내가 들고 오려고 하면 한사코 실버차 캐리어에 담으라고 하신다. 물건이 많이 실리면 그만큼 밀고 가기도 힘드니 내가 들고 가겠다 말씀을 드려도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 텅 빈 캐리어 놔두고 왜 팔 아프게 들고 가냐 성화시다. 결국 엄마의 말씀대로 실버차에 물건을 싣고 나면 실버차는 엄마의 보행보조 역할을 하니 무겁다고 내가 대신 밀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괜히 마음만 복잡해지곤 한다. 여든이 넘은 노모 곁에서 쉰이 넘도록 나는 여전히 철부지 막내딸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며칠 전, 친구분들과 함께 외출을 하셨던 시어머니가 길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손목을 다치셨다. 내내 활달하시고 건강하셨던 어머니가 올 초부터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셔서 늘 염려가 되는 참이었는데 게다가 이런 사고를 당하시니 온 가족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깁스를 하고 수술을 준비하시는 어머니를 뵙고 자초지종을 듣던 중 최근부터 다리에 힘이 없어서 걷기가 많이 힘드시단 말씀을 들었다. 동네에 친구분들도 많고 경로당에서도 인기가 많으신 어머니이시지만 건강이 나빠지고 난 이후로는 주로 집에 계시다가 아주 오랜만에 마음을 먹고 친구들을 만났다 이런 일을 당하셨으니 이제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쓸쓸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까지 건강하셨던지라 어머니께는 특별한 보조기가 없었던 것 같아 이제부터는 지팡이라도 짚고 나가셔야 한다고, 그리고 친정 엄마도 이미 실버차를 사용하시는데 아주 유용하다 하신다는 말씀을 드렸다. 조용히 들으시지만 아직은 뭔가 그런 보조기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머니께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으시는 눈치였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심정이다.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니 괜히 홀로 계신 엄마 생각도 나고 어머니의 빠른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십사 부탁도 드려야겠다 싶어 친정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들으신 엄마는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안타까워하시다 이제 절대로 그냥 나가시면 안 되니 지팡이든 실버차든 꼭 사용하시게 하라고 당부하셨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내키지 않으신 것 같다고 답했더니 엄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야~ 그거 얼마나 편한데... 그거 있으면 뛸 수도 있다~!!"

한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여든이 넘으신 우리 엄마를 뛰게 만드는 실버차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실버차에 대한 엄마의 신뢰가 나를 한참을 웃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고도 마음에 남는 엄마의 말을 곱씹으면서 "낯설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실버차가 아무리 편리한들 엄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매 순간을 위해 실버차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 엄마는 분명 용감하고 지혜로우신 분이다. 남들이 보면 측은해 보일 수도 있는 엄마의 뒷모습과는 달리 엄마는 열심히 당신에게 주어진 날들을 살아내고 계신다는 사실에 가슴 숙연해지며, 그와 동시에 거리에서 마주치는 알지도 못하는 어르신들을 무작정 측은하게만 여긴 것이 얼마나 주제넘은 일이었나 반성이 되었다. 일일이 다 들을 수는 없겠으나 앞으로는 그분들 안에도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과 치열하게 살아내야할 그 날의 삶이 있음을 잊지 말고 존중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마음먹었다.


우리 엄마는 아직 소녀 같으시다. '뛸 수도 있다"는 엄마의 웃음을 자아내는 말씀의 음원을 공유할 수 없어 아쉽지만 내가 그 말씀을 듣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 이유는 엄마의 소녀다움이 여전히 살아있음에 대한 반가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감사한 것은 우리 엄마나 시어머니 두 분 모두 여든이 훌쩍 넘으신 분들 이지시만 아직도 여전히 곱고, 단정하시고, 주변을 돌보시는 분들이라는 사실이다. 때때로 마음이 약해지거나 갑자기 찾아오는 변화에 전에 없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실 때도 있지만 더욱 바라고 기도하기는 두 분 모두 지금 이 모습처럼 곱고 단정하게 당신들의 여생을 가꾸어가실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분에게도 주저되는 많은 상황들이 있고 그래서 얼마나 힘을 다하고 용기를 내어 살아가고 계시는지 잊지 않는 것이다.



©NAYOUNG 2024




#노인보행보조기 #어르신유모차 #실버차 #친정엄마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을 그리는 작가, 프레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