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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 ATHANASIUS YI OSB Mar 30. 2024

나는 부활하여 지금 너와 함께 있다(Resurrexi)

전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스위스 아인지델른 수도원 봉쇄구역 내 수도자 경당 제대의 부활하신 예수님상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모릅니다. 조금 있다가 복음이 낭독될 때에, 그제야 빈 무덤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기쁩니다. 부활 성야 때 세 번이나 벅찬 “알렐루야!”를 불렀고, 서로 부활 축하 인사를 주고받고서, 미사 후에는 다과를 들면서 다함께 이 기쁨을 즐겼습니다. 그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낮미사를 거행하면서 다시 한 번 기쁨의 인사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젯밤에 그 기쁨을 너무 누린 나머지 늦은 밤까지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에는 목소리가 많이 잠겼습니다. 미사 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지 걱정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입당송(Introitus)은 우리 목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낮게 부르는 곡입니다.

  사실 이 곡은 낮은 음역대보다도, 노래 자체의 분위기가 오히려 부활 낮미사 입당을 왠지 모르게 조심스럽게 만듭니다. 성탄 때 같으면 꼭 트럼펫으로 팡파르를 울리듯이 시작했던 입당성가가, 오늘은 어두움 속에서 무언가를 더듬어 찾듯이 조심스럽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에서 ‘라’까지의 음역대가 주는 선법 자체의 분위기를 꼽아볼 수 있습니다. 마침음이 ‘미’이고, 이 선법으로 시편을 노래 불렀을 때에 낭송을 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주는 음인 테너(Tenor)가 ‘라’인 제4선법은 본래 기쁜 날하고는 그다지 어울리는 선법이 아닙니다.

  15세기의 중요한 음악 이론가이자 파싸우에 있었던 성 베네딕도회 포른바흐 수도원(Kloster Vornbach am Inn) 수도자이기도 했던 풀다의 아담(Adam von Fulda)은 그의 저서 『음악에 대하여』(De musica)에서 제4선법을 “quartus dicitur fieri blandus”라고 했습니다. 번역하기는 조금 까다롭지만 풀어서 설명하자면, 네 번째 선법은 매력적이어서 우리의 마음을 달래고, 그 마음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선법으로 만들어진 노래는 전통적으로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는 내용,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는 내용을 꽤 많이 담고 있습니다. ‘미’를 같은 마침음으로 삼는 제3선법과 함께, 교회는 이 두 선법을 ‘미-선법’이라고 하고, 그래서 ‘레’를 첫 번째 마침음으로 보았을 때 ‘데우테루스’(Deuterus - ‘두 번째’) 즉, 두 번째 음인 미가 마침음이 되는 선법이라고도 합니다. 또 중세의 음악 이론가들은 그리스의 이론을 가져다 쓰면서 이 선법을 프리지안(Phrygian)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성음악이 발전하게 되는 르네상스시기에 오면, 노래에 화성을 붙이면서 소프라노와 테너가 3선법이면 알토와 베이스가 4선법, 반대로 소프라노와 테너가 4선법이면 알토와 베이스가 3선법이 되면서, 3선법과 4선법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프리지안 선법으로 만들어진 노래라고 일컫게 됩니다. 이 프리지안 선법의 곡 가운데, 우리에게도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가톨릭성가 116번, 「주 예수 바라보라」입니다. 이제 제가 이렇게 길게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는지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기쁨을 노래해야 할 부활 낮미사가 이렇게 슬프고 한탄하는 선법으로 만들어진 노래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옛날에는 우리보다 전례가 더 길고 힘들어서 낮미사를 부르기에 힘드니까 좀 쉬자는 의미에서 저렇게 만들었을까요?

  ‘파’에서 ‘미’로 내려가는 반음은 ‘시’에서 ‘도’로 올라가는 반음과 그 느낌이 아주 다릅니다. 무언가 더 조심스럽고, 그래서 곡의 마침은 더 여운을 주듯이 느릿느릿합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리보리우스 올라프 룸마 교수(Prof. Liborius Olaf Lumma)는 그래서 이 곡을 예수님이 한숨을 내쉬는 것 같다고 합니다. 꼭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후...”하고 한숨을 푹 내쉬시는 것 같다고 하면서요. 한편 독일 에쎈의 슈테판 클뢰크너 교수(Prof. Stefan Klöckner)는 이 곡을 부활 신앙과 연관시킵니다. “부활은 성탄과는 반대로 개인적인 신앙 안에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주님 부활 대축일의 이 입당송을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음들로 부르는 것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 성탄은 ‘이다’이고, 부활은 ‘되어간다’입니다(Weihnachten ist – Ostern wird).” 확실히, 우리가 지난 밤 노래한 부활은 다음 주에나 되어서야 알 것 같습니다. 아직은 빈 무덤뿐이니까요. 조심조심 빈 무덤만 확인하고, 많은 것이 아직은 물음표입니다. 이제 시작한 부활은 앞으로 우리 삶 안에서 완성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살펴보면, 앞서 룸마 교수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독백 같습니다. “저는 부활하여 지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어주셨나이다. 당신의 알으심이 놀랍사옵니다.” 그런데 이 가사의 텍스트인 라틴어 시편 138편의 18절과 5-6절은 히브리어 시편 139편 번역본과 많이 달라 보입니다. 특히 노래의 첫 구절인 시편 138편의 18절을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의 배 이사악 수녀님은 “끝까지 가 닿아도 도로 당신이오이다”로, 주교회의가 승인한 전례시편은 “끝까지 이르렀다 하여도 저는 여전히 당신 안에 있나이다”로 번역합니다. 임승필 신부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본디 ‘제가 깨어나도’로 되어있지만 어떤 히브리어 수사본들과 함께 모음만을 바꾸어 번역”했다고 합니다. 시편의 전체 문맥상 “세어보자 하여도 모래보다 더욱” 많은 하느님의 아득하신 생각에 대한 이야기 뒤에 나오기엔 조금 어색한 표현이긴 합니다. 그래도 그 구절만 따로 놓고 보았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하는 구절로 사용하기엔 아주 훌륭하지 않나 합니다. 그리스어 70인 역본과 라틴어 불가타 시편은 이 구절을 “Exsurréxi, et adhuc sum tecum”(저는 잠에서 일어나 지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로 번역했고, 교회는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목소리(Vox Christi)로 알아듣고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저는 잠에서 일어나 지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수난을 당했고, 묻혔노라. 그런데 자, 나는 부활했다”라고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 밤을 새어 모래보다 더욱 많은 하느님의 알으심을 끝까지 세어보다 지쳐버린 우리 모습도 같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의 목소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니까요.

  “저는 부활하여 지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 저는 지난 밤, 밤을 새어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당신 신비를 생각했고, 이제 다시 일어나 지친 몸으로 이 노래를 부릅니다. 후...


* 이 글은 수도원 후원회원들을 위한 무가지인 분도지 2020년도 봄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분도지에 사용한 악보는 독일 콘브리오 출판사(Conbrio-Verlag)에 직접 허락을 받고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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