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좋은 나라
'그래서 왜 인도네시아였어?'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수도 없이 받는 질문이다.
비즈니스를 하러 온 게 아니니,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라면 너무나도 궁금한 상황인가 보다.
남편은 중학교 때 결심을 했다. 어려운 나라에 가서 돕겠다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남편에게서 왜 그런 결심이 섰는지는 모르지만,
상업고등학교에 가서 취직이나 빨리 했으면 하는 친척들의 눈초리 속에서 대학교는 못 갈 것 같고
대학교를 못 나올 것 같으면 외고라도 나와야 인정받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생존본능으로 근처 외고를 입학해 버렸다. 그 안에서도 중국으로 가서 돕겠다는 마음에 중국어를 전공했다. (30년 전이니 중국이 경제성장을 하기 전이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크니 꽤나 방황했던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니 결혼하고 7년쯤 되었을 때 남편이 물어보았다.
'슬기야, 어디까지 갈 수 있어?'
'ㅋㅋㅋㅋ 그래 오래 참았다. 글쎄... 어디까지 내가 갈 수 있을까?'
아이들은 3살 5살이었고 이 어린 녀석들을 데리고 어딜 갈 수 있을까?
큰 아이는 약했다.
그래서 병원은 좀 잘 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래도 도시였으면 좋겠다.
안전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해 낸 곳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였다.
베트남 쌀국수를 좋아해서 베트남이 가고 싶었고
싱가포르 여행 때 잠깐 들렀던 인도네시아 작은 섬사람들이 너무 친절해서 인도네시아, 아니 자카르타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말한다 한들 그게 이뤄질까, 그저 가능할 것만 같은 도시를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우린 인도네시아에 왔다.
나의 첫 홀로 해외여행은 싱가포르였다. 졸업을 앞두고 해외연수며 여행이며 다녀온 동기들 사이에서 해외를 안 나가본 건 나 혼자였다. 참 초라해져 보였달까.. 그 길로 무조건 티켓을 찾았다. 영어도 못해 경험도 없어 돈도 없어, 그런 내가 나가려 하니 겁부터 났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를 찾았다.
싱가포르.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중에서 베트남항공이 가장 저렴했다. 왕복 18만 원, 텍스를 붙이니 27만 원이었다. 베트남을 경유해서 가는 일정이었고, 입출국을 정할 수 없는 2주간 싱가포르에 있어야만 하는 일정이었다. 돈은 없고 시간만 있는 나에겐 최적이었다. (싱가포르를 이틀이면 다 볼 수 있는 걸 도착해서야 알게 된 건 비밀..ㅋㅋ)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일단 떠났다.
인도네시아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잠시 들리게 되었었다.
한 시간쯤 배를 타고 가서 입국장에 들어섰는데, 정말 막막했다.
영어도 못하고 그곳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런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준 인도네시아 사람들, 그 인상,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못 알아듣는 날 보며 하나하나 천천히 말해주고 두 번 세 번 반복했던 입국장 아저씨
당황하고 있는 외국인을 보며 당황하지 않게 침착시켜줬던 사람들.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첫인상은 참 좋았다.
그 이후 유럽과 미주, 아시아를 돌아다닐 기회들이 있었지만 그런 인상을 받았던 곳은 사실 없다.
오늘도 딸내미와 밥을 먹으며 얘기하는데 딸내미가 말한다.
'엄마 근데 솔직히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진짜 착한 거 같아.'
거두절미하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착하다.
족자카르타에 오면서 정말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여러 면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친구들. 한결같이 우리가 외롭진 않을까 늘 챙겨주고 도와준다.
Kim이 인도네시아 문화를 알아갔으면 좋겠고,
Kim이 이곳 생활이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가 돕겠다고 왔는데, 우리가 도움을 받고 있다.
이게 뭐... 지? 착해서 그런가...??
아니야, 이게 '정'이구나.
친구가 음식을 만들어 줬다.
'어머니 식사 챙기면서 조금 더 했어~ 먹어봐~'
아이고... 이렇게 두 그릇 가득 맛있게 만들어주다니.. 고마워라..
우리가 챙겨야 하는데 늘 챙겨 받기만 하니 감사함 뿐이다.
멀리 자카르타에서 보내온 바틱옷,
탁시말라야에서 보내 준 음식들,
람풍에서 보내온 간식거리,
아이 하굣길에 챙겨 온 인도네시아 대표 식재료까지..
어느 것 하나 '정'이 없는 것들은 없다.
그저 착함으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정이 있는 곳이다.
정은 초코파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