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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진수 변호사 Jul 16. 2022

변호사용품#02 가방 이야기

그 어떤 중간 지점에 잘 안착하기



변호사의 주된 업무는 의뢰인과의 상담, 서면 작성, 수사기관 입회, 법정 변론이다. 업무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보여진다. 그래서 외관을 만드는 아이템, 가령 옷이나 가방, 시계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개성 발현의 전제는 자유로운 선택일텐데, 변호사는 그렇지 못하다. 법으로 정해진 복식은 아니지만 '통상적인 룰'이 있다. 감색 클래식한 정장에 붉은 계열의 넥타이, 옥스퍼드 토 검정색 구두, 구두 색깔과 맞춘 벨트같은 것들이다.


'통상적인 룰'은 선배 변호사님들이 만들어 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룰이라 생각한다. 감색 정장은 클래식한 수트의 대명사로서, 짙은 청색은 색체심리학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돕고 기분을 진정시킨다고 한다. 붉은 계열의 넥타이는 포인트라고 할 것인데, 어떤 사람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선배 변호사님들은 인간이 대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대한 깊은 고찰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통상적인 룰을 만드셨던 것같다. 사후적인 고찰을 통해도 매우 유려하고 합리적이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고, 자유의 대전제는 선택에 있다. 아무리 유려하고 합리적이더라도 개성을 표출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변호사는 통상적인 룰이 있다보니 개성을 표출할 아이템이 제한적이다. 미친 개성을 뽐냈다간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나 의뢰인의 선택을 받지 못해 굶어죽기 십상이다. 물론 실력과 명성이 월등해서 이런 것쯤은 하찮게 무시해도 되는 변호사님이 있다. 그러나 아마 그 변호사님도 그 지위에 오르시기 전까지는 선배 변호사님들이 정한 '통상적인 룰'을 지키셨을 것이다.


변호사는 '통상적인 룰'이 있기에 개성을 표출하기 힘들다. 모 기자님은 변호사들을 인터뷰하고 자주 만나는 분이셨는데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변호사님들은 거의 비슷한 양복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의 성격을 짐작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넥타이나 시계로 어림짐작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몇가지 소품을 유심히 관찰해서 짐작하면 거의 대부분 예상이 맞더라고요." 몇 가지 아이템은 그 변호사 정체성의 전부인 셈이다.



변호사에게 개성 표출은 힘들다.
정체성과 타인의 경계에 획을 긋고 있지만 마니아에는 속하지 않는,
어떤 중간 지점에 잘 안착해야 한다.




교대역에 있는 양꼬치집에서 한 변호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방이랑 넥타이는 좀 좋은 걸로 바꿔야 되겠다." 수습 변호사 시절 '통상적인 룰'을 몰랐다. 업무 시작 전 사수님이 빨질레리에서 감색 양복을 하나 사줬다. 단벌신사였기 때문에 양복이 문제 되진 않았다. 다만 넥타이는 아버지 것, 캐나다 상설마켓에서 산 갈색 가죽가방을 들고 다녔다.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브리프케이스라 선택지가 없었다. 흠집이 나고 각이 살아있지 않아 볼품이 없긴 했다.


[몽블랑 브리프케이스] '통상적인 룰'의 정석이다. 몽블랑은 만년필로 유명한 회사인데, 특유의 젠틀한 이미지가 있다. 몽블랑은 남자 변호사가 많이 찾는 브랜드다. 지갑, 명합지갑, 벨트 모두 이 브랜드 제품을 쓴다. 비슷한 브랜드로 듀퐁이 있고 법조계에서 많이 찾지만 변호사만 애용하는 브랜드는 아니다.


몽블랑 브리프케이스를 샀다. 사실 내 돈으로 산 건아니고 장모님이 선물해주셨다. 사위에게 선물하는 가방을 고르시는 장모님은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것이다. 주변에 있는 변호사 지인분에게 많은 자문을 구하셨을게 눈에 선하다. 대학동기 모임에 가니 패션에 관심이 많은 녀석이 아는 체를 했다. 사업자 모임에 가니 모임장 형님이 같은 가방을 쓴다며 반가워했다. 뭔가 유려한 변호사가 됐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유려한 변호사가 된 것같다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서초동에서 개업을 했고, 스스로 막변이라 칭한다. '막변'은 막 굴러다니는 변호사의 줄임말인데, 전관 출신도 아니고 대형로펌에 속하지 못해 반강제적로 개업한 변호사를 통칭하는 말이다. 내가 어떤 변호사인지는 멋지게 포장된 인터뷰로 대신한다.

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24534


인터뷰 글에 있는 것처럼, 작은 사건이라도 목을 걸고 임해서 광고비용 없이 의뢰인이 의뢰인을 소개하게 만든다는 것이 내 영업전략이다. 유려한 변호사가 됐다는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은 신념때문이 아니라 이런  전략과 영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주제에 유려한 모습을 해가지고서는 자리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인 상담을 위해 찾아가고 증거수집을 하는 과정에서 브리프케이스는 짐만 될 뿐이었다. 제출한 수많은 증거때문에 두꺼워진 기록을 갖고 다니기에도 이 가방은 너무 작고 불편했다.




작고 예쁜 몽블랑 가방은 놔두고 예비적인 가방을 찾았다. 내게 맞는 가방은 이동 중에 전화를 편하게 받을 수 있고, 수납공간이 크며, 걸어다니며 기록을 볼 수 있는 백팩이었다. '통상적인 룰'을 벗어나진 못해서 컨버터블 3way 백팩을 구했다. 평상시 브리프케이스처럼 쓸 수 있으면서 끈을 빼서 고리에 걸면 백팩이나 옆가방으로 변하는 가방을 3way 라고 한다. 대학시절 유행했던 브랜드 인케이스에서 3way 백팩을 샀다.


인케이스 3way 백팩


[인케이스 3way 백팩] 백팩을 들고 다니니 너무 편했다. '통상적인 변호사랑 다르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법정에 들어갈 때나 의뢰인을 만나기 전 주섬주섬 브리프케이스로 가방을 변신시켰다. 혹시나 백팩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쳐질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어차피 백팩 브랜드는 몽블랑 가방이 있으니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생겼다. 양복에 인케이스 백팩을 들고 다니니 무시를 당하는 것같았다. 의뢰인을 찾아 상담을 했지만 사건 수임에 실패한 날이라든가, 입회 담당 수사관이 묘하게 신경을 긁은 날 뭐라도 핑계거리가 필요했는데 가방이 당첨다. 이유가 뭐였을까 복기해서 문제점을 바로잡는 대신 가방 탓을 한 것이다. '인케이스 백팩을 들고 다니니 사건이 없는 변호사로 보여서'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고 멍청한 생각이다.




부끄럽고 멍청한 생각에 꽂혀 '브리프케이스와 백팩이 동시에 되면서도, 돈이랑 사건이 많은 변호사처럼 보여주는 가방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날따라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영화같은 어느날 자격지심이 '펑'하고 터져버렸다. 백화점에 갔다. 명품브랜드 매장을 돌았다. 명품인게 티나고 번쩍번쩍하면서 브리프케이스와 백팩이 모두 되는 가방을 찾았다. 같이 간 아내는 눈쌀을 찌푸리면서 그만 두라고 했지만, 결국 구찌 백팩을 샀다. 아내는 구찌의 신, 염따 형님도 이런 가방은 안 살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의 난 자격지심이 너무 깊었다. 거금을 썼다.

 

구찌 2way 백팩


[구찌 2way 백팩] 누가봐도 명품인게 눈에 보였다. 가방을 산 다다음날 한국인터넷진흥원에 조정이 있었다. 감색 정장에 이 가방을 메고 갔다.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니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뭔가 눈에 씌였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자동차 창문이 비친 모습은 너무 과했다. 전혀 전문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잘 나가는 변호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돈 많은걸 자랑하려는 졸부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조정은 다행스럽게 완전하게 이겼지만, 조정과정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 꼴이 어떻게 보일까는 생각만 계속 했다.




집에 와서 깊은 반성을 했다. 너무나 모순투성이였다. 먼저 남들과 다른 변호사가 되고는 싶은데 '통상적인 룰'에 매달려 컨버터블 가방이나 메고 다니면서 주섬주섬 가방을 변신시켰던 꼴이 한심했다. 더불어 '인케이스'와 '구찌'를 넘나들며 어떤 중간지점에 잘 안착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도 한심했다.


원칙을 정했다. 일단 이동 중에 사건을 보고 전화받을 때 두손을 쓰는건 너무 편했다. 나는 모양이 좀 빠지더라도 백팩이 편했다. 그리고 백팩을 메고 다니는 것이 내 영업상 전략과 영업에 어긋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그냥 백팩을 메기로 했다. 고작 백팩 하나 메고 다니는게 결단이냐 할 수 있겠고 물론 맞는 말다. 그만큼 나는 '통상적인 룰'에 벗어나고 싶지 않고 소심하다.


명성있는 변호사라면 가방 브랜드 따위에 신경쓰지 않겠지만, 사실 난 명성있는 변호사는 아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또다시 가방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한 백팩 브랜드를 찾기로 했다. '인케이스'나 '구찌' 모두 훌륭한 브랜드이나 어떤 의미로든 업무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내 정체성이 '백팩'이라면, 타인의 경계선과 너무 충돌되는 선택은 피하기로 했다. 실제 타인의 경계선이라기 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타인의 경계선이겠지만, 그 어떤 중간 지점에 잘 안착해보기로 했다.


투미 백팩


[투미 백팩] 투미 백팩을 샀다. 수험시절 메고 다녔던 브랜드라 친숙하기도 하고, 나름 샘소나이트의 고급 브랜드 라인이며, 재질과 마감이 훌륭한 가방이다. 색깔은 튀지 않게 검정과 갈색이 배합된 것으로 골랐다. 수납공간이 넉넉하고 정장에도 예쁘게 잘 어울렸다. 마침내 계속 쓸 가방을 정했다. 마음이 흡족하고 기뻐서 인스타그램에 소회를 올렸다. 그 글만 본 분들은 뭘 이런걸 인스타그램에 올리나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투미 백팩을 메고 있다. 이상한 자격지심 없이 업무에만 몰두하고 있다. 다만 쓰지 않는 가방이 세 개나 있다. 구찌 백팩은 아까워서 사복을 입을 때 가끔 사용한다. 중국 부자같다. 아내는 여전히 그 가방을 메면 눈쌀을 찌푸린다. 안 쓰는 가방을 당근마켓에 팔라고 하나 난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쓰는 물건은 다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다. 그래서 변호사용품에 대해 연재를 해보고 있는 중이긴 하다. 지난 일을 되돌아 생각해보면 물건은 무생물이지만 생물같기도 하다. 물건의 변천은 인생을 담고 있고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난 5년차인 저년차 변호사에 불과해서 지금까지 자리잡아온 영업 전략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투미 백팩도 그에 따라 바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건 지금까지 했던 경험은 다음 결정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점이고, 난 또 그 어떤 중간 지점에 잘 안착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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