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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un 06. 2024

어머니의 목소리

내게는 어느 분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에 소중하게 저장되어 있다. 혹여 잃을까, 손상될까 노트북에도 백업해 두고, 그마저 미덥지 않아 USB와 클라우드에 또 백업해 놓고 있다. 하지만 선뜻 듣지는 못하고 있다. 미리 가슴이 먹먹하고 눈가부터 붉어지니 늘 주저하고 있다. 어머니의 생전 목소리다.

  

어머니는 자주 전화를 주셨다. 세상일에서 아주 사소한 나쁜 일이라도 들리면 아들에게도 일어날까 염려하신 것이다. 한 번 전화하면 연이어 몇 번을 하셨다. 다하지 못한 말이 생각나면 당신의 염려와 당부가 깨끗이 비워져야만 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한 통화는 몇 번의 전화벨이 이어진 뒤에야 끝나곤 했다. 하시는 말씀도 늘 한결같은 일상의 것이라서, 철없을 때는 그런 일로 전화 좀 그만하시라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업무 중에는 전화를 받지 않거나 끊어버리기도 했으니 못된 행동이었다.

  

어머니는 노쇠해지고도 전화를 자주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회의를 주재하는데 또 벨이 울렸다. 자주 그랬듯이 받고는 끊어버렸다. 퇴근길에 전화를 드렸지만 받지 않으셨다. 혹시 그 전화가 어머니의 마지막 전화가 아닐까 하는 불경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일찍 잠드신 것뿐이었지만 그다음부터는 회의 중이라도 양해를 구하고 꼭 전화를 받았다. 대화 시간도 고작 이십 초 내외이고 늘 한결같다. 밥은 먹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를 모자간에 서로 묻고 확인하면 그게 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전화하시는 것이 뜸해지셨다. 그제야 늘 곁에 계시리라 생각했던 어머니께서는 이미 천천히 당신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계심을 알았다. 어느 날, 날로 힘을 잃어가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한참을 눈가를 누르다가 문득 어머니의 목소리를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지금에 생각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그래서 어머니와 통화한 것을 수십 개 파일로 간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쉬이 들을 수가 없다. 막상 들으려고 하면 불효의 후회가 밀려오고 가슴이 울먹거려 재생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진다. 아픈 데는 없느냐, 밥 먹었냐는 한결같은 자식 걱정뿐인 목소리에 지금도 고향에 계신 듯한 착각이 든다. 마치 생시 같다.

  아버지의 목소리도 간직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둔하여 미처 그러지 못하였다.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잃어본 아픔을 알기 전이라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년쯤에는 스마트폰의 효용이 크게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아버지의 목소리를 간직할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내가 삼십 대였을 게다. 휴가로 고향에 갔을 때 외출하고 귀가하니 몇 명의 여학생이 대문을 막 나서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학생들인데 일제 징용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때의 상황을 녹취해서 연구한다고 온 것이라 하셨다. 기억으로는 국민대학교 학생이라고 한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때 복사본을 얻어 놓았더라면 아버지의 목소리와 젊은 시절 고난의 시간 일부나마 알 수 있을 텐데 그때는 그런 철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아버지를 알고 찾아왔는지도, 징용 이야기도 궁금하지 않았고 그런가 했다. 그 대학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학교도 정확지 않고 학과도 모르고 오래된 일이라 그게 남아있을 리가 만무할 것이다.

  

또 하나는, 작년에 아버지의 6.25 참전 기록을 찾으려 한 적이 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오래전에 고향의 어느 잡지에 아버지의 생을 구술한 인터뷰가 실린 기억이 났다. 그때 아버지의 삶이 몇 페이지로 압축된 글을 읽고 스산한 가을바람을 맞은 듯이 마음이 처연했다. 그 느낌을 글로 써놓았다가 돌아가신 뒤, 사진과 함께 엮어 책자로 만들어 형제들에게 나누어준 적이 있었다. 

  

기자와 연이 있던 막냇동생이 내 글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더니 잡지에 싣고 싶다고 했으나 거절한 기억이 있어 동생에게 연락했다. 기자는 기록을 소중히 생각하니 혹시나 녹음된 무엇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잠시 기쁨에 들떴다. 그러나 십오 년이 지난 세월에 이미 잡지는 폐간되었고 기자도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며칠 뒤 가까스로 기자와 연락이 닿은 모양이었다. 기자는 고맙게도 특별히 온화한 어른이었다며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이프는 모두 없앴다며 그때 찍었던 아버지의 사진 몇 장을 보내오는 것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미안함을 표시해 왔다. 찾았더라면 잡지에 미처 싣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더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다 그른 일이 되어버렸다.

  

노랫말에도 목소리로 애타는 마음을 그리는 것이 많다.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라든지,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와 같이 모습보다 목소리를 그리워하고 있다. 누구나 그리운 부모님의 흔적을 소중히 여기지만, 많은 이들은 사진 몇 장과 유품 몇 점으로 그리움을 희석할 뿐이다. 

 유품은 아련하고, 지난 시간을 주마등같이 떠 오르게 한다. 사진으로 볼 때는 짧은 탄식이 날 뿐이고,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없음에 그리움이 더 애달프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생시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대로 계신 듯 나에게 다가온다. 

  

눈을 감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면 꿈이었던가, 절절한 그리움이 가슴을 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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