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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Nov 18. 2024

값싼 아픔

구청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청사 로비에서 책상을 펴놓고 어떤 여성 한 분이 말을 걸어온다. 서명 한 번만 해달라고 한다. 그 목소리는 무엇을 갈구하는 듯이 애절하고 표정은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하다. 지나치려는데 보육원, 입양이라는 단어가 들려온다. 가던 걸음이 붙잡힌다. 발걸음을 멈추어 책상에 다가가 서명하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월정액으로 얼마간 기부해 달라는 청을 한다. 두 손을 모으고 발을 동동 구르듯 한 자세가 너무나 간절하다. 애초 바라는 게 이거구나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돌아서면 한참이나 뒤 꼭지가 뜨끈해지기 마련이다.

  

매월 작은 기부를 하겠다는 약속과 필요한 것을 적어주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야기하니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지청구가 돌아온다. 당신도 넘어갔군, 하는 표정이다. 나름 뿌듯한 마음이었는데 아내의 지청구가 섭섭했다. 아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 단체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기부금을 부실하게 관리하여 끝이 좋지 않았던 씁쓸한 경험이 몇 번이나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딸내미도 몇 번의 그런 경험으로 요즘에는 외면하는 듯했다. 오늘 일은 구청 청사 내에서 하는 것인데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싶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오래전, 회사 내에 기부 모임이 있어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불우이웃 돕기를 한다는 모임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그해 연말에 보내온 결산서에는 집행부가 거창하게 식사한 비용이 있었다. 당시 중견 사원 월급의 거의 30%나 되는 밥값이었다. 속이 부글거려 바로 모임을 탈퇴한 기억이 있다. 어느 국제 구호 단체가 도심지에 커다란 빌딩을 가지고 있는 것에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선의의 기부로 모든 것을 꾸려가는 조직이 어떻게 그런 큰 빌딩을 가졌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의 무지였으면 좋겠다. 언젠가 모임이 있어 어느 식당에 갔더니 누구나 다 아는 단체가 거기서 전국지사장 회의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회의를 고급식당에서 못할 바는 아니나, 적어도 전 국민이 십시일반 모은 정성으로 살림을 꾸리면서 그런 안내문을 떡 내걸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에 아내가 못마땅해한 것은 그런 단체의 부실과 배신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과 또 다른 마음 아픈 사연이 있어서일 것이다.

  

내가 그 요청에 발걸음을 멈춘 것은, 애절한 목소리에 보육원, 입양이라는 단어가 들려서였다. 벌써 이십 년이 흐른 시간이다. 아내가 보육원에 가끔 봉사활동을 갔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봐주는 곳이다. 어느 날 한 아이를 집에 데려왔다. 아직 백일도 안 되는, 스스로 뒤집기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였다. 그러고는 얼추 이 년 동안의 태반을 집에 데려와 키우다시피 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가 혼란스러워할까 봐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아이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완전 위탁은 아니었으나, 우리를 엄마, 아빠로 부를 만큼 깊은 정이 들었다. 깊어가는 정에 그 아이를 입양해야 하느냐는 깊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당시 40대 초반, 앞날은 늘 희미했고 IMF를 막 빠져나온 시절,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서글픈 말이 유행하는 시절이었다. 경제력과 앞날을 헤아리면 어림도 없다는 생각에 시름만 깊어가던 시간이었다. 좋은 집에 입양되도록 해주소서, 하고 날마다 기원을 하는 것만이 시름을 달랠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이를 집에 데려오면 온 집안에는 온기가 돌았고, 보내면 가슴이 미어지는 만남과 이별만 반복하던 그해 가을,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그 아이를 입양하겠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바랐던 행운이 왔는데, 그 아이를 보내고 한잔 술에 취해 목놓아 울기도 했다. 그 기억이 떠올라 발걸음이 쉽게 서버렸을 것이다.

  

아내도 그 아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녀석의 배냇저고리와 장난감을 고이 싸서 아직도 장롱 어딘가에 보관하는 아내다. 오늘 일로 들추어내어진 아픔이 나에게로의 지청구가 되었으리라. 나도 한참 동안 녀석을 떠올렸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녀석이 남긴 몇 점의 사진을 하나하나 열어 봤다. 함께했던 시간이 흘러내렸다.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서울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으리라.

  

오늘 나의 것은 너무도 소소하여 기부라 할 것도 없지만,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웃에게 베풀고 온정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일부 단체의 헛된 짓거리로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색안경을 쓰고 보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앞장서 그런 일을 못 하는데,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구호 단체가 도심지에 커다란 빌딩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고, 좋은 식당에서 회의하는 것도 다 사연이 있을 것인데 나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자신을 희생하여 단체를 만들고 선의를 퍼뜨리고자 열심히 뛰는 분들이 그나마 이 사회를 조금은 따뜻하게 하고 있을진대, 일부의 일탈로 모두가 매도당하고 백안시한다면 그게 더 문제가 아닐까, 하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매월 자동이체 날이면 감사 문자와 함께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연도 같이 온다. 어쩌나. 나의 이기심은 값싼 아픔만 함께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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