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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un 25. 2024

아버지의 6.25

 아내가 친구의 시어른 부고를 받고는 돌아가신 분이 6.25 참전 유공자라서 호국원에 모신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면서 ‘아버님께서도 생전에 6.25에 참전하셨다고 한 것 같은데, 알아보고 신청하면 어때요. 당신 요즘 별로 할 일도 없으면서’라고 한다. 말끝에 붙은 ‘별로 할 일도 없으면서’라는 말이 속을 살짝 긁었지만,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 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 유공자가 되더라도 무슨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산에 계신 아버지를 아무리 국립묘지라도 다시 모실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2005년 정부에서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를 조사했을 때는 신청하여 인정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달리 보상은 없어도 아버지의 고난의 삶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생전에 아버지는 군대를 두 번 다녀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일제강점기 말에 징용을 갔다 오고도 군대를 두 번씩이나 갔다 온 것인데,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도 늘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뵐 때면 가끔 젊은 날의 회상을 끄집어냈으나,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평온한 삶을 살고 있던 우리 세대에게는 그런 이야기는 무용한 이야기였고 남의 이야기였으니 말꼭지부터 슬며시 화제를 돌리곤 했다. 기억을 가다듬어 보니, 카투사(KATUSA)에 근무했다는 말씀과 포병으로도 복무했다는 정도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 고향에 갔을 때, ‘Surfin’U.S.A’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후반부에‘Inside outside USA’가 반복되는데 아버지께서 그것을 듣고는 ‘안으로 밖으로’라는 뜻이라고 하시기에 깜짝 놀랐다. 소학교를 간신히 나오신 아버지가 어떻게 영어 노래를 듣고 해석하시나 싶어 여쭈니, 카투사에서 복무해서 조금은 들린다고 하셨으니 카투사에서 근무한 것은 분명한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첫 번째 입대인지 두 번째 입대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버지의 유품을 보관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조그만 나무상자를 아내가 한지공예로 멋을 낸 유품 함이다. 주민증, 도장, 그리고 늘 손에 들고 계시던 수첩 등, 유품이랄 것이 별로 없다. 수첩과 몇 가지 서류를 찬찬히 다시 찾아보니 군번과 입, 제대 날짜를 적어 놓은 쪽지가 있었다. 붓글씨 쓰듯이 볼펜을 가볍게 쥐고 삐쳐 쓴, 고졸하게 느껴지는 옛 어른들의 필체다. 군번 97365XX. 그리고 2002년도에 발급된 병적증명서가 있었다. 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손수 병적증명서를 떼어 보셨을까. 군번을 써놓고, 병적증명서를 떼어 보신 것이, 혹 지금의 내 생각처럼 당신이 직접 6.25 참전 증명을 받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시다가 미처 마무리를 못 하신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이 떠난 집에서 적적한 시간을 보내면서 지난날을 회상하신 것을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저며왔다. 그러나 증명서에는 입대 기록이 한 번밖에 없었다. 두 번째 입대는 가정을 꾸리고 큰 누님을 낳은 뒤에 늦게 또 입대했다고 하시더니 병적증명서의 입대 기록은 그것을 말해주었으나, 전쟁 기간의 복무 이력은 없었다.


6.25 참전 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6·25 기간의 군 복무기록이 있고,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신청서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기간의 복무기록이 없으니 혹시나 하여 다시 병무청에 갔다. 국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키 높은 플라타너스가 서 있는 널찍한 청사 마당에, 징병검사를 받으러 온 장정들이 반바지 유니폼을 입고 흡연 장소에 모여있다. 나의 그 시절에는 팬티차림으로 온종일 어느 학교 강당에서 검사를 받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입는 옷을 별도로 주는 모양이다. 가까이 가보니 스무 살이 넘은 청년들이지만 얼굴은 아직 어린애처럼 앳되다. 6·25 때 십 대의 학도병들의 처지는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처연해진다.


마찬가지였다. 기록이 없으면 인우보증((隣友保證)으로 가능하다고 하는데 집안의 어른들도 다 돌아가시고, 그 시절을 알만한 분은 계시지 않는다. 종형에게 물어보니 어릴 때 휴가 나오신 아버지에게서 건빵을 받은 기억은 있다고 하나 그것은 두 번째 입대일 것이고 앞선 일은 50년생인 종형의 기억에도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도 말년에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하고팠던 것과 남에게 이야기해 주고 전해 주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것을 들어주고 해 줄 사람은 유일하게 아들 하나 일터인데, 그때는 미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아버지와 조곤조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별로 없다. 지난 이야기를 꺼내시면 슬며시 외면했으니 더 이상의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전의 아버지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은 후회는 이것만이 아니다. 여든쯤이시던 어느 날, 고향에 갔더니 궤짝에서 보따리를 하나 꺼내 풀어놓으셨다. 거기에는 언젠가 먼 길 가실 때 입을 옷이 있었다. 미리 준비한 영정사진도 보여주시며 당신이 돌아가신 뒷일을 당부하셨다. 언젠가 될 날에 아들의 힘을 덜어 주려 손수 그렇게 준비해 놓고 당부를 했으나, 그때는 그것을 보는 것조차 민망하고 죄스러워 벌써 이런 것까지 준비하시냐며 핀잔처럼 답하며 유심히 듣지 않았다. 장례를 치를 때 먼 옷은 입혀드렸으나, 영정사진은 기억하지 못하고 급하게 다시 마련했다. 삼우제를 마치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옷장 구석에서 아버지가 준비하신 영정사진을 발견하고 그제야 그때 말씀이 다시 떠올라 또 한 번의 불효에 오열하고 말았다.


옛날에는 어버이가 돌아가시면 행장行狀을 기록하는 것이 자식이 해야 할 또 하나의 도리였다. 어른이 되었지만, 철은 들지 않았고 멀리 떠나신 지금에야 조금의 철이 들어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이리저리 흔적을 찾아보고 있지만 때늦은 일이 되고 말았다. 


또 하나의 단서는 있다. 아버지 생전에 고향의 잡지에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생이 압축된 글에는,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어머니와 헤어져 용인에서 국군과 함께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혹시 군번이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참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단서로 아버지의 자취를 또 찾아볼 것이다. 기어이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회한이 되어 평생 내 가슴을 짓누를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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