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지 못한 전쟁과 함께 또 6월이 다가온다. 과거에는 6월이 되면 6.25 전쟁을 주제로 한 노래가 종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곤 했는데, 시간의 흐름이 그 기억을 흐리게 하는 것인지 모두가 전쟁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날의 기억을 잊지 말자는 교육과 다짐을 받으며 자라난 우리 세대도 그 참혹함과 일으킨 자에게 품은 원망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경험치 못한 세대이더라도 전쟁의 상처는 이십 년 가까이 지난 내 어린 시절에도 그 흔적은 남아 있었고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처럼 뇌리에 박혀있다. 백성의 가난이 오랜 시간 우리 역사와 함께했을지라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 심해졌고, 뒤이어 일어난 전쟁은 한동안 헤어나지 못할 가난과 고통의 시간을 주었으니, 혜성의 꼬리 같이 길게 드리운 전쟁의 그림자는 오랜 빈곤과 결핍의 시간을 지나게 했다.
어린 시절 동네의 어른들을 회억 한다. 하릴없이 막걸리 몇 잔으로 불콰해진 얼굴로 온종일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누구네 아버지. 아침이면 지게를 지고 어디론가 갔다가 해거름이면 돌아오던 또 누구네 아버지. 전쟁 이후 다시 고향에 내려와 터전을 잡는 바람에 평생 바깥일을 하면서 고생하신 아버지는 그나마 직장은 아니더라도 직업은 있었으니 조금은 다행이랄까. 이런 상황의 상당 부분은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니었을까. 4.19가 일어난 1960년에 우리나라 국민의 실업률이 대략 25% 정도였고, 잠재 실업률까지 치면 절반 정도의 국민이 실업 상태였다는 오래 전의 어느 신문 기사가 그 시절 기억이 맞음을 확인시켜 준다.
전쟁이 지나간 긴 시간 뒤에도 그 결핍을 증명하는 것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신문지조차 매우 귀한 시절이었으니 방의 벽을 벽지로 바르는 것이 호사였던 그 시절, 벽지의 대체재 구실을 한 것은 시멘트 부대 종이였다. 그 부대 종이 겉면에는 두 손이 악수하는 그림이 예외 없이 그려져 있었다. 한쪽 손에는 태극기 문양이, 또 한쪽 손에는 성조기가 그려진 손이 악수하는 그림이었다. 미국의 원조품이었다.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 모퉁이에서 태극기와 성조기가 흐릿하게 비치던 벽지가 지금도 떠오른다. 고향 동네에서는 그것을 ‘돗가루’ 부대 종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시멘트를 돌가루라고 불렀고, 다시 돗가루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이 부대 종이의 용도는 참으로 다양했다. 이삼 년에 한 번씩 구들장을 새로 놓고 장판을 새로 깔 때면 그것은 더 유용한 대체품이었다. 부대 종이를 방바닥에 바르고 군불을 때어 말린 후, 콩기름을 바르면 원래 장판지와 비슷하게 누르스름하니 딱 맞았고 시중에 파는 장판지와 진배없었다.
교과서를 받으면 책 표지를 싸기도 했다. 그 질긴 그 질감은 일 년 동안 책을 보호하여 동생에게 물려줄 때 적어도 표지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였다. 또 공책으로 대용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이다. 돗가루 부대 종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옛날 책 엮듯이 옆면을 무명실로 엮어서 아버지에게서 한글과 산수를 배웠다. 그 누런 종이 공책과 나의 첫 선생 역할을 하신 아버지 덕분에 입학 전에 한글은 물론 곱셈과 나눗셈까지 깨쳤으니 나의 학업은 기초는 아버지와 함께 이 종이가 큰 역할을 했을 성싶다.
고향 집은 철둑 동네였다. 철길과 철둑은 놀이터였고 게다가 기차역에 가까운 동네라 달리던 기차뿐 아니라 방향을 바꾸기 위해 천천히 마을 앞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구경하는 것도 눈의 호사였다. 이미 증기기관차가 사라진 70년대 초반, 세련된 디젤기관차에는 선글라스를 멋지게 쓴 기관사가 여유롭게 앉아 있었고, 그 기관차의 정면과 옆면에도 어김없이 태극기와 성조기가 악수하는 그림이 있었다. 육중한 덩어리가 천천히 철로를 지나갈 때 우리는 멋진 제복에 선글라스의 기관사를 보면서 미래를 동경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종례를 마치자 선생님은 책상 위에 시험지를 한 장씩 펴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일일이 다니면서 시험지 위에 커다란 옥수수빵 한 덩이씩 놓아주셨는데, 고소한 냄새와 발효 냄새는 지금도 코끝에 있는듯하다, 소중히 싸서 집에 오는 길은 어린 동생들과 나누어 먹을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미국원조로 받은 옥수숫가루로 만든 빵이라 했다. 옥수숫가루의 거친 식감도 있고, 부드럽게 발효가 된 것도 아니었으나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은 수업 시간을 더디게 했다. 특히 윗부분은 적당히 태워서 껍질이 딱딱했지만, 우리는 유난히 그 껍질 쪽을 탐했다. 6학년부터는 그 옥수수빵 급식이 끊어졌는데 아쉬운 기억이다. 지금도 빵을 먹을 때마다 군것질의 거의 전부였던 그 빵이 그립다. 같은 기억이 있는 아내는 그때는 먹을 게 없어서 맛있었지, 지금은 줘도 먹을 것 같냐고 핀잔을 주지만 제빵 일을 한다는 친구 아들에게 부탁해볼까 싶은 그리운 맛이다.
전쟁은 오래전에 멈추었지만, 빈곤과 결핍의 시간으로 오랫동안 우리에게 남아 있었다. 그 결핍의 시간의 얼마간을 그나마 메워 준 것들이 기억 속의 그런 원조 물품이었다. 돗가루부대종이, 밀가루, 가루우유, 유년의 놀이터였던 철로 위의 기관차, 아직도 날마다 그리운 옥수수빵의 구수한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