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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옥 Jun 07. 2023

우주 속 작은 먼지의 고찰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구나’라는 자의식이 언제 생겼는지도 알기 힘든데. 한참 자라고 나서 드문드문 남아있는 유년의 기억이 전부다. 그냥 언젠가부터 난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의 시작은 모두에게 축복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막상 본인에게는 흐지부지하게 잊혀진 어느날이라는게 참 이상하다.


반면 자신이 죽는 순간은 자다가 평화롭게 숨이 넘어가는 운이 닥치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나 아주 선명히 각인될 것이다. 난 그 기분이 어떨지 자주 상상한다. 내가 ‘없어지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그냥 툭, 끊기듯 사라지는 걸까? 굳이 비슷한 경험을 찾자면 아마도 잠에 드는 순간 정도겠다.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정확히 기억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잠에 드는 순간 의식도 사라지니까. 다음날 아침에 눈이 떠지면 ‘아 내가 잠들었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지만 죽으면 그 다음날이 찾아오지 않는게 문제다. 오늘로부터 하루, 이틀, 몇 년이 찾아오다가(부디 그러길 바란다) 어느날 나에게 미래가 없을 거라니.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모두에게 공평한 끝. 죽음.


한참 죽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릴 때에는 죽음이 무엇인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생의 고통이 끝나는 수단으로서 간절히 원했는데, 이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하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 앞에서 저절로 다리가 풀리는 기분.


그럼에도 난 들여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찾을 수 있으니까. 끝이 예정되어 있는 유한한 시간, 우주의 시선에서는 찰나에 불구한 먼지의 삶은 결국 짧은 여행이 아닐까. 눈 감았다 뜨면 허무하게 지나가있을텐데 아둥바둥 목숨걸지 말자고 다짐한다. 나보다 먼저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들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 사랑하기로 한다. 그럼 그들의 파편이 내 마음에 영원히 남을 수 있으니까.


역시 물리법칙을 거슬러 소멸하지 않는 유일한 건 사랑이다. 요즘은 그게 삶의 목적의 전부인 것 같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추억을 충만하게 차곡차곡 쌓는 것.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어서 자야하는데 어찌 매일 밤마다 죽음을 맞이하는 기분이라 눈을 감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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