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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옥 Aug 07. 2023

자격에 대하여

고등학교 1학년, 극심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을 때 그런 나를 다 보고 다 받아준 친구가 있었다. 사실상 그에게 자아를 위탁해서 달뜨고 위태로운 첫 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가 전학을 가는데 너무 멀리 가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땅이 무너지는 슬픔, 절망, 고통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원망은 한 적이 없었다는 걸, 십 년도 넘는 세월을 건너 그와 재회하고서야 깨달았다. 친구는 내가 버려졌다고 생각했을까봐 늘 미안했다는데 난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내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었다. 낙엽 한 조각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세상이 날 거부한다고 느끼던 내가 왜, 어쩜 그렇게 성숙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


자격. 존재 가치를 폄하당하는게 일상이었던 난 내가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익숙했다. 그런 친구를 만난 게 기적이지 내가 그가 준 행복을 마땅히 누릴 자격은 애초에 없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도합 십오 년이나 늦게 찾아온 이 허탈한 깨달음에 한동안 뒤늦게 슬퍼했다. 그리고 뒤늦게 이리저리 헤매며, 내가 행복하기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는 의구심을 밀어내고, 그저 존재만으로도 누려도 되는 것들을 축하하며 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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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지금 이런 거 할 때다’ 모임을 하면서 자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의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스스로에게 너그럽기 참 어려운 것만 같다. 지쳐서 쉬고 싶은데도 나에게 쉴 자격이 있는지 묻게 된다.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다고 하니 등단을 준비하는 거냐는 질문이 돌아오고, 그게 아니라고 하니 그럼 어떻게 작가가 될 생각이냐는 반문이 이어진 적도 있다. 그러다보면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려면 충분한 돈, 시간, 능력, 경험이 단단히 갖춰져있어야만 한다고 자꾸만 믿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것에 어떠한 ‘자격’도 필요하지 않은데.


타인이 생각 없이 뱉은 판단의 잣대와 그것들이 쌓여서 내 마음 속에도 솟아오른 장벽을 다 치우고 나면 거기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해봐도 된다. 그래도 잘못이 아니다. 이것이 온 우주가 당신으로부터 숨기던 비밀이다. 그냥... 해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


그냥, 다들 힘을 풀고 좀 더 느리고 편안하고 즐겁고 하찮은 것들을 우스워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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