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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옥 Oct 03. 2023

그래, 솔직히 내가 먼저 작가를 꼬셨다.

독립출판물 <깍두기> 제작기 #02. 기획

영혼 없어 보이지만 동기부여 하는 거 맞음


<깍두기> 기획의 8할은 작가 꼬시기였다. 책의 원형이 된 한국어 그림 일기도 나의 강력한 제안으로 연재를 시작했었다. 한국어 연습용으로 혼자 쓴 한국어 일기가 너무 웃겨서 혼자 보기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게 잘 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이걸 책으로 한 번 내보자고 살살 꼬드겼다. ‘작년에 내가 책 낸 거 보지 않았냐. 꼭 출판사에 투고해서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그냥 독립 창작자로서 책을 자체적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나한테 원고랑 그림 주면 내가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할게.’ 내 책이 아닌 남의 책을 만들면 이전에 비해 부담이 좀 덜 할 거란 생각도 있었다.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책 콜? 콜.

아무튼 2023년 상반기 즈음, 작가님의 협조를 극적으로 얻어냈다. 참고로 선인세나 정산 비율 등을 협의하거나 계약서를 쓰지는 않았다. 작가님과 나는 법적인 부부 관계라서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네 돈이다. 호호… 그래서 구두 계약으로 충분했다. 지금부터는 작가의 동기와 멘탈을 잘 관리해 주고 동시에 본격적으로 책을 기획할 차례였다.



기획 vs 집필, 뭐가 먼저일까?


내가 배운, 책을 만드는 대략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기획 - 집필 - 편집 - 디자인 - 인쇄 - 유통


다만 어떤 분들은 평소에 틈틈이 쓰던 글이 일정 정도 모이면, 그걸 돌아보면서 역으로 기획을 뽑아내기도 한다고 한다. 반면 나의 첫 책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은 명확한 기획에서 출발해서 , 목차까지 거의 다 완성된 상태에서 주제에 어울리는 글을 썼었다. 이건 뭐 개인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깍두기>는 이 중 어디에 해당했을까? 아무래도 전자에 가깝다. 집필 전에 기획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매우 루즈했다.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이 한국에서 살면서 겪었던 일, 들었던 생각” 정도의 주제만 잡혀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사실 책을 염두에 두고 내놓은 기획이 아니었다. <깍두기>를 쓴 네일기 작가님은 책을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기 약 1년 반 전부터 꾸준히 한국어 그림일기를 만들어서 인스타그램에 연재하고 있었다. 그 그림일기의 주제가 바로 책의 주제와 다름이 없었다. 어느 정도 일기가 쌓인 뒤에 이를 책으로 내놓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일기만 모아서 그림책의 형식으로만 내기에는 부족할 것 같아서 글을 덧붙이기로 한 것이다. 그림일기 포맷의 한계상 담을 수 있는 글이 대여섯 개 문장 정도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부연설명 겸 관련해서 하고 싶은 얘기를 풍부하게 적어보기로 했다.


근데 책을 만들어본 분이라면 여기서 좀 갸웃할 것이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있었던 일? 이걸 기획이라고 보기에는 좀…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맞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겪을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그걸 무슨 메뉴를 80개씩 파는 김밥천국처럼 쫙 펼쳐놓은, 산만한 책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난 남의 일기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는 약간의 흥미 요소는 있을 수 있겠으나 그걸 제하면 ‘남이 어디서 뭘 먹었고 친구랑 무슨 수다를 떨었고 자기 전에 누워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이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내가” 왜 읽어야 하지?’라는 질문에 답을 주기 어렵다. 그걸 설득시키려면 1)필력이 기깔나게 좋거나 2)사람 자체가 흥미를 끄는 인물이거나(연예인 등), 아니면 3)일기에서 출발은 했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일관된 주제를 중심으로 묶여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편집자로서 나의 선택은 3)이었다. 1)은 원고를 받아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2)는 우리에게 해당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3)은 편집자인 나의 역량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작가님이 집필을 하던 도중에 책의 정체성과 다름없는 한 편의 글을 써내고 거기에 기가 막힌 제목을 붙였다. 그 제목이 바로 ‘깍두기’였다.


작가님은 어딜 가도 한국인들에게 언제나 환영받고 친절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한국인 친구를 만나서 놀이에 끼워주기는 하지만 결코 무리의 일부로 받아주지 않는 존재를 의미하는 ‘깍두기’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이자 책에 담길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와 대화를 나눈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깍두기에 대한 글을 좌르륵 써내고 책 제목 역시 ‘깍두기’라고 붙이겠다고 내게 말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지금까지 쓴 글의 주제는 각기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경계에 서 있는 타자의 시선’이라는 교집합이 있었고, 그 교집합을 깍두기라는 단어로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꾸로 뒤집어서 읽는 책을 만들면 어떨까?


책의 특성상, 기획 과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특수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언어의 문제였다. 네일기 작가님이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원고를 쓰고 그걸 내가 번역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과연 하나의 책에 담을 수 있을까? 아니면 두 책으로 나눠서 출간해야 하나? 일단 우리 둘 다 전자로 마음이 기울었었다. 비록 대부분 한국인 독자들은 한국어로 책을 읽겠지만, 작가의 모국어로 표현된 원문을 읽을 선택지 역시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책을 두 권 제작하면 총 제작 부수가 동일해도 제작 단가는 거의 두 배로 치솟는다는 문제 역시 있었다. (규모의 경제 법칙에 따라, 1개의 책을 1천 부 찍는 것과 2개의 책을 각각 500부씩 찍는 걸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더 비싸다.)


그렇다면 대체 페이지 레이아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안 그래도 이 문제 때문에 서울 국제 도서전에 갔을 때 2개 이상의 언어가 병기된 책을 찾아다녔었다. 거기서 본 책은 대부분 한 페이지를 절반으로 나누거나,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 각각에 언어를 하나씩 할애한 형식이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의 언어로 전달하는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면의 절반 밖에 차지하지 않는 게 좀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동일한 분량을 읽으려면 페이지를 더 자주 넘겨야 하기도 했고.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바로 앞뒤로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거였다. 마치 영어로 된 책 1권, 한국어로 된 책 1권을 만들어서 한 권을 뒤집은 다음 뒤표지끼리 이어 붙인 형식이었다. 그러면 앞에서부터 펼치면 영어로만, 뒤에서부터 펼치면 한국어로만 읽을 수 있었다. 글로 설명하면 잘 와닿지 않을 것 같아서 아래에 책을 뒤집어서 읽는 시연(?)을 첨부한다.



(내 기억에는 이 아이디어를 내가 낸 것 같은데, 작가님은 자꾸 본인이 낸 것 같다고 한다. 사실 둘 다 긴가민가해서 누구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아이디어가 좋았고 의사의 합치가 이루어졌으니 되었다.)



완성되지도 않은 책의 샘플책을 만들면 무슨 일이 생길까?


내 기억에 작가님께서 집필을 막 시작했던 게 2023년 6월 정도였는데, 마침 7월 초에 전주에서 열리는 ‘전주책쾌’라는 북페어에 셀러로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이왕 가는 거 <깍두기>에 대한 잠재적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미리 홍보도 하자는 마음으로, 페어 참가 일주일 전에 얇은 샘플책을 후다닥 만들었다. 대여섯 편의 글의 일부를 발췌해 허겁지겁 번역을 하고 그림일기와 글을 어떻게 배치할지 결정한 뒤, 두 책을 하나로 이어 붙인 듯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데에 약 9시간 정도 걸렸다. 분량이 많지 않아 공책처럼 얇은 책자가 되었지만 간단히 보여주는 데에만 의의가 있었기에 상관없었다. 아무리 얇아도 책의 형태로 탄생한 글을 보니까 얼른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독자님들 허락 받고 사진 촬영했습니다!)

실제로 페어에서도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일단 독립출판계에 외국인이 주체가 되어서 쓴 책이 드물기 때문에 그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워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작가님의 그림을 다들 귀여워했다. 허접한 샘플책인데도 돈을 주고 구입하고 싶다는 분들도 계셨다. 이때 함께 부스를 지켰던 네일기 작가님께서 자신감이 많이 붙었다고 했다. 내가 글이 재밌다고, 그림이 좋다고 수백 번을 말해도 “넌 내 와이프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객관적일 수가 없잖아!’라는 반응만 돌아왔는데 역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말은 잘 듣는다… 깔깔. 작가의 동기부여를 담당하는 편집자로서 제 역할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근데 동기부여가 너무 과했던 걸까...



???: 어차피 편집하다보면 줄어드니까 넉넉하게 쓰라며…?


작가님은 페어에서 돌아와 약 한 달 동안 초고 작성에 박차를 가했고, 드디어 8월 중순 경에 다 썼다며 내게 보여주었다. 보고 순간 놀라 자빠질 뻔했다. 분량이 이랬기 때문이다.


20만 자, 단어 3만 8천 개…? 평소에 영문 자기소개서를 첨삭할 때 A4 1장에 단어 350개 정도가 들어간다고 보고 견적을 책정하는데, 그 말인즉슨 이 책을 A4 판형으로 제작해도 100페이지가 넘어간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잡지도 아닌 단행본을 A4로 만들리는 없고. A4의 절반 사이즈인 A5로 제작을 해도 200장. 근데 그걸 한국어로 번역해서 앞뒤로 이어 붙이면… 400페이지…? 근데 그림도 넣어야 되잖아?

아, 이건 지금 당장 못한다. 열자마자 편집에 들어가야겠다는 나의 의지가 파스스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어차피 연말까지만 만들기로 했었으니 당장 시작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 어차피 내 일도 바쁘니 조금만 쉬었다가 하자. 조금만, 조금만…


그러다가 그렇게 미루기로 한 과거의 나를 멱살 잡고 싶어지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깍두기>는 10월 말부터 전국 독립서점을 통해 판매할 예정입니다. (지역 서점과의 상생을 위해 개인 통신판매, 대형/온라인 서점에서 유통할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서점에 입점하기에 앞서, 인쇄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먼저 예약 판매를 진행합니다. 독립 창작자와 1인 출판사의 작은 목소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책을 예약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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